문득 다가오는 눈빛
문득 다가오는 눈빛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 승인 2016.12.08 1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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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하늘이 회색빛 옷을 갈아입더니 꽃잎을 털어냈다. 첫눈이다. 날리는 꽃잎을 보며 차를 몰았다. 40분을 달려 도착한 시골에는 찬기가 술렁이고 있었다. 커튼을 열고 눈 내리는 풍경을 거실 안으로 들였다. 찬기를 몰아내려 톱밥 난로를 피우고 아궁이로 갔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당겼다. 아궁이에서 밀려나오는 불꽃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몸을 녹여 주었다. 찬바람 술렁이는 월문리 초저녁, 뼛조각 같은 달이 뾰족하게 굴뚝에 걸려 있었다. 굴뚝에선 몽글몽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안테나처럼 우뚝 솟은 굴뚝에 기억의 주파수를 맞춰 본다. 순간 애절한 눈빛이 펄럭였다. 아우슈비츠를 향하는 기차에 오르는 얼굴이 잡힐 듯 사라진다.

며칠 전 영화관에서 만난 사람들.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그 애잔했던 음악과 아픈 사연이 응어리 되어 가슴에 남았다. 자살자의 찬가라는 별칭으로 전 세계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전설적인 노래 글루미 선데이. 그 선율이 며칠째 스믈스물 연기처럼 피어나 귓바퀴를 맴돌고 있다.

1935년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애잔하게 펼쳐진 사랑의 파노라마, 그리고 역사적인 전언까지 담은 영화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 사람의 사랑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헝가리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로나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야기다. 서로 각도가 맞지 않아 비켜간 살처럼 상처가 남은, 혹은 적중해서 깨져버린 거울처럼 아픈 이야기다.

자보와 안드라스 그 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일로나의 천진하고 맑은 눈빛, 자신이 가진 마지막 자존심과 인간으로서 존엄성마저 한스에게 무참히 짓밟히자 죽음을 선택하게 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의 처절한 눈빛,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를 타며 보냈던 자보의 애잔한 눈빛. 눈빛들이 지워지지 않고 흩어지는 연기위로 자꾸 떠오른다.

월문리 밤하늘 굴뚝에서 뽀얀 연기가 품어져 나온다. 계절이 밀어올리는 몽글몽글한 솜털위로 자보를 태우고 달리던 기차에서 흘러나오던 연기가 겹친다. 그리고 그가 사라져갔을 아우슈비츠의 굴뚝의 연기, 그리고 아우슈비츠 굴뚝 위로 몽글몽글 승천했을 공포에 찬 수 많은 눈빛들을 상상해 본다. 연기 위로 하얀 꽃잎이 가만 가만 내려앉는다.

하늘과 땅 사이 자꾸 떨어지는 흰 꽃. 희고도 흰 포근하고 포근한 꽃잎들의 향연. 난로보다 따듯하고 양털보다 가벼이 덮어주고 싶은 것이 있어 자꾸 자꾸 떨어지는 것이리라. 정지보다 따듯하고 움막보다 포근한 눈발 하얗게 갈기갈기 날리는 동안 생각에 젖는다. 하늘이 털어내는 뽀얀 꽃잎 이불되어 지붕 위를 하얗게 덮는다.

마당에 나서서 목을 뒤로 젖히고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려 본다. 입에 흰 꽃 한 장 떨어진다. 알싸한 추억이 꽃잎을 녹이며 기억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문득 편두통의 봉기처럼 시간을 뚫고 올라오는 나를 스쳐간 눈빛 눈빛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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