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해를 보내며
묵은해를 보내며
  • 안상숲<생거진천휴양림숲해설사>
  • 승인 2016.12.0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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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안상숲<생거진천휴양림숲해설사>

묵은해를 보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던 열두 달 전에도 이리 추웠었지요. 여러 달 한파를 견디고 새봄을 맞이했을 때가 떠오르네요. 땅이 풀리자 초록을 길어 올리던 풀과 나무들. 갈잎 아래에서 혹은 햇볕 잘 드는 양지쪽에서 길고 긴 잠을 청했던 곤충들이 그제야 깨어나 봄을 맞이했었지요.

대부분 곤충은 이 혹독한 겨울을 어찌 보낼까요.

사마귀는 단열재 같은 거품 속에 알을 낳아 겨울을 보냅니다. 그냥 보기에도 따뜻해 보여 안심이지요. 땅속이나 나무껍질 속에서 잠이 든 아이들도 걱정이 없습니다. 허술해 보여도 그나마 집이라도 갖춘 거미나 사마귀 나비목 곤충의 고치들은 추위에도 끄떡없어 보여요.

그러나 때로는 나뭇잎 아래 맨몸으로 잠이 든 네발나비나 노린재, 무당벌레, 묵은실잠자리를 만나게 되면 이제 곧 닥칠 한파에 덜컥 겁이 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설마 대책 없이 추위에 맨몸으로선 건 아니겠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 긴긴 겨울을 무사히 잘 견뎌낼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겨울을 성체로 나는 곤충들은 추위가 시작되기 전의 순응 과정을 거쳐 겨울을 단단히 준비합니다. 먼저 몸속의 소화관을 비우고 제거하여 서서히 탈수합니다. 생명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수분은 당으로 바꿔 어는점을 낮춥니다. 당과 같은 물질들은 과냉각(슈퍼컬링) 상태를 유도하여 동결 후에 일어날 수 있는 조직과 세포의 손상을 방지합니다. 과냉각 상태란 0도이지만 얼지 않고 액체 상태로 유지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초겨울 시기에 항 동결 단백질을 합성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체내 혈림프의 빙핵을 제거하여 외부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도 얼지 않게 한답니다. 빙핵을 제거한 순수 물은 어는점이 영하 40도라 합니다.

그렇게 몸속 미량의 수분은 당으로 바꾸고 항 동결 단백질을 합성하고 또 혈림프의 빙핵을 제거하여 얼지 않도록 추위에 대비합니다.

준비가 끝난 묵은실잠자리는 햇볕 잘 드는 나뭇가지에 완전히 의태한 채 잠이 듭니다. 나뭇가지나 풀 가지인 척 숨어 있어서 아무리 실력 있는 술래라도 찾기 어렵지요. 완전한 휴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생명활동 외에는 거의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지요. 실 핀처럼 작고 가는 몸은 가끔 햇볕을 향해 뒤척일 뿐이지요.

추위라는 고통 속에 몸을 맡기고 겨울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모습이 무모해 보입니다. 알이든 번데기이든 어떻든 제 몸 감싸주는 허물조차 없는 맨몸이 안쓰럽습니다.

그렇게 새해가 되고 봄이 오면 한 해를 묵었으니 진짜 묵은실잠자리가 됩니다. 그러니 묵은, 이라는 이름은 훈장과도 같습니다.

묵은해를 보내려는 마음이 불쑥 부끄럽습니다.

묵은실잠자리처럼 제대로 살아낸 날들이었나 돌아보게 됩니다. 해마다 쌓이는 묵은해들이 나를 얼마나 깊게 해주었을지 기대도 되기는 합니다. 묵어 깊어진다는 것, 온갖 풍상과 시련에도 과냉각 상태와도 같이 나 자신을 유연하게 지킬 수 있었는지…. 혹여 고만고만한 시련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건 아닌지 묵은실잠자리의 월동을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합니다.

지난 한해 더 할 수 없는 기쁨과 경이로움을 안겨준 숲에 감사하며 숲의 친구들이 무사히 겨울을 살아내기를 응원합니다.

새해 새봄, 어느 새날에 숲 속 어디쯤에서 약속처럼 다시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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