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 `우리' 나라와 국가
국민과 `우리' 나라와 국가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6.11.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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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거기에는 `우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준엄하지만 아름답게 외치는 함성과 촛불에는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적용되었던 그동안의 인위적 `국민'이 `우리'라는 든든한 공동체로 마침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광장에는, 세상이 경이로워하는 우리의 주말 광장에는 가장 먼저 회한과 반성의 절절한 눈물이 흘렀습니다.

숨죽여 눈치만 보던 언론, 권력에 빌붙어 오직 자신들의 정치생명만을 연장하려던 정치인, 경제적 이득만을 추구해왔던 재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권위적 모순들이 차마 반성하지 않는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어떤 이는 “(별 생각 없이 투표를 한)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자식들과 후손들에게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라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런 광장에서 우리는 평화를 누렸고, 질서를 외쳤으며, 또 끓어오르는 분노를 축제의 희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광장의 촛불을 통해 어둠을 몰아내고 `국가'로 넘어가 찾으려 하지 않았던 다양한 주권을 다시 광장으로, 그리고 그저 허울뿐인 `국민'이 아닌 `우리'의 주권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광장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공유했으며, 그리하여 정치보다는 공동체가 앞서는 희망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국가'보다는 `나라'를 먼저 떠올리게 된 건 결코 우연일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분명히 천명한 헌법 정신을 되살리며 국민, 국가, 영토라는 법률적이며 형식적인 구성 요건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광장은 찬란합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의문과 분노를 통해 전달하려는 의미는 `국가'보다는 훨씬 포괄적이고, 또 장엄합니다.

광장의 우리들이 `나라'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정권에 대한 심판이거나, 대통령에 대한 하야 요구라는 단순한 요구를 초월해 더 깊은 생각과 더 절실한 변화를 갈망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통치자의 얼굴이 자본가의 얼굴과 연예인의 얼굴 속에서 겹쳐지고 지워지면서 권력의 새로운 효과를 생산하는 문화와 산업, 그리고 독점 재벌을 통해 언젠가는 모든 것을 망치게 될 것'이라는 프랑크프루트 학파 아도르노와 호크 하이머의 경고를 우리의 광장은 먼저 깨닫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거치른 들판의 솔잎'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걱정하지 말고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격려하며,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아침이슬'을 서로에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장은 광야처럼 넓어져 `우리 어찌 가난 하리요.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를 외치면서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고 노래합니다.

그저 묵묵하게 참아내던 `국민'이라는 복종의 사슬을 끊고 `우리'를 스스로 만들어 가며 대한민국의 주권이 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습니다.

선출된 권력자이거나 세습된 재벌, 또는 이성이 마비되는 개발 신화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국가'를 우리 모두의 `나라'로 만든 위대함이 2016년 겨울, 광장과 촛불에 있습니다.

끝내 (대통령의) 임기단축을 포함해 국회 결정에 따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발표를 이끌어 낸 우리의 광장과 촛불은 정치권을 주목하게 됐고, 정권 이양은 준비될 것입니다. 광장의 촛불에 이 말이 위로가 될까요. 생각이 깊어지는 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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