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의 영물 괴산군민 가마솥
괴산의 영물 괴산군민 가마솥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승인 2016.11.27 17: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앞에서도 거론하였듯이 괴산의 지명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나무 중의 왕인 느티나무 괴(槐)자를 사용한다. 옛 조정을 가르칠 때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를 괴부(槐府)라고 불렀는데 그 유래는 의정부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 또는 느티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연유로 해서 왕이 있는 궁궐은 괴신(槐宸), 나라의 외교에 관한 문서를 맡아보던 승정원은 괴원(槐院), 3정승의 자리를 괴위(槐位), 3정승의 지위를 나타내는 말로 괴정(槐鼎)이라 불렀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느티나무 고을 괴산(槐山)의 솥 정(鼎)으로 해석된다.

괴산의 지명 변천은 고구려 때에는 잉근내군이었으며 선덕여왕 때 괴양으로 다시 괴주로 바뀌었으며 태종 13년에 들어서는 괴산으로 불리고 있다. 이렇듯 괴산은 느티나무와 천년 이상 인연을 맺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권과 관계가 있는 느티골(槐) 솥(鼎)제작은 필연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괴산군민의 가마솥은 군의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고 전 군민이 한솥밥을 먹음으로써 한 식구라는 이름으로 내려오는 정을 나누는 전통과 미덕을 계승하고 군민의 슬기와 지혜로 대화합과 살기 좋은 괴산을 발전시켜 전 세계로 뻗어나가길 바라는 염원에서 군민의 성원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제 세계 최대 괴산 군민가마솥 제작 과정과 솥에 조각된 용, 거북이, 무궁화의 상징과 민속 문화로 솥에 새긴 문양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괴산군은 2004년 2월 5일 군민가마솥제작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군민과 출향인사들의 정성어린 성금과 각 가정에 폐허된 고철을 모으고 군비를 보조하였다. 크기는 80㎏들이 쌀 50가마 분량의 밥을 한꺼번에 지어 4만명 군민 모두가 동시에 먹을 수 있는 대형 솥 제작을 기획했다. 조각은 인성석재 대표 윤규현씨가 맡고 제작자인 동하주물 대표 박상진씨의 장인정신에 의해 세상에서 가장 큰 가마솥을 탄생시켰다.

솥 제작은 지름 5.68m 둘레 17.85m 높이 2.2m 두께 7cm 무게 43.5톤(본체30^뚜껑13.5)으로 완성됐다. 사업비는 보조금 3억4000만원, 성금 1억9300만원, 고철 2900만원 등 약 5억6200만원이 투자되었으며 실제 솥 자체 제작은 성금과 고철 모으기 판매대금 약 2억300만원으로 제작되었다.

솥뚜껑 제작은 5차 작업 일인 2004.9.8일 성공하였고 기간은 1년 6개월이 소요되었다.

가마솥 안치는 2005.7.27일 청안면에 있는 동화주물에서 괴산읍 동부리 괴산청결고추유통센터 부지 내 화덕으로 옮기는 과정의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거쳐 무사히 안치되었다.

솥을 옮겨 부뚜막에 안치하는 데는 크레인 1대(200톤), 대형트럭 2대(솥뚜껑), 트레일러 1대(본체), 카고 1대(뚜껑 적재) 등이 동원되었으며 청안에서 괴산까지 운반하는데 2차로를 다 차지한 채 경찰차의 호송을 받으며 9시간 만에 안치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대다수 군민의 염원과 군민 대화합의 역량 속에 솥뚜껑 제작 4번 실패, 본체 쇳물 주입 3번 실패 속에 박상진 대표의 피나는 노력과 인내로 기술을 꼼꼼히 보완하여 드디어 괴산군민의 가마솥이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걸작이 되어 어둠 속의 태양처럼 빛을 솟구쳐 올렸다. 다음에는 가마솥에 조각된 민속문화와 상징물에 대하여 기고하고자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