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를 그리며
배호를 그리며
  • 김기원<시인·문화평론가>
  • 승인 2016.11.2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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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 김기원

11월이면 더욱 그리운 사람이 있다. 29살 젊디젊은 나이로 `마지막 잎새'처럼 11월에 떠난 사람. 배호,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떠난 지 45년이나 지났건만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건 그의 노래가 내 영혼에 깊숙이 박혀있는 탓이리라. 그의 노래는 어렵고 힘들던 시절 적잖은 위로였고 위안이었다. 아니 나를 키워준 바람이었다. 꿈 많던 사춘기엔 멋모르고 따라 불렀고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땡겨서 불렀다.

너무나 가난해서 너무나 높은 벽이 많아서 세상 어딘가에도 기댈 언덕이 없어서 좌절하고 분노했던 암울했던 시절 그의 노래는 비타민이었고 버팀목이었다.

배고플 때도 서러울 때도 가슴이 답답할 때도 분노가 치밀어올라 하늘을 향해 애꿎은 삿대질을 할 때도 그의 노래는 그림자처럼 내 곁을 맴돌았다. 공부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술 마시거나 놀러 갈 때도 흥얼거렸고 논두렁 밭두렁 길을 걸을 때도, 바람 부는 신작로를 걸을 때도 불러댔다.

그렇게 부르노라면 배고픔도 미움도 원망도 서러움도 분노마저 눈 녹듯이 사라지곤했다.

어느덧 60대 중반의 초로가 되었건만 아직도 11월이 오면 그때 불렀던 그 노래들이 내 황량한 가슴에 낙엽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진다.

배호(裵湖). 1942년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일제 말에 태어나 빈곤과 질병의 보릿고개를 넘다가 1971년에 요절한 가슴시린 가수 배호. 본명은 배신웅, 호적상 이름은 배만금인 그는 광복군 출신의 배국민과 김금순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고 북경심포니교향악단 지휘자를 역임한 둘째 외삼촌 김광옥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작곡했던 KBS 악단장을 지낸 셋째 외삼촌 김광수와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자로 MBC 악단장을 지낸 넷째 외삼촌 김광빈으로부터 음악적 소양을 물려받은 천부적인 가인이다.

1958년부터 김광빈 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였고 1960년 부평 미군부대 캠프 마켓 클럽에서 2년간 악단 생활을 하다가 1963년 21세 때 `굿바이'와 `사랑의 화살'을 녹음하면서 예명을 배호로 지었다. 1964년 낙원동·프린스 카바레에서 배호와 그 악단이라는 밴드를 꾸려 드럼을 치며 노래하는 가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같은 해 반야월 작사 김광빈 작곡의 `두메산골'이란 타이틀로 1집 음반 `황금의 눈'을 내고 공식 가수로 데뷔하였다.

1966년부터 1971년 세상을 뜰 때까지 5년 동안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가 울어', `안개 속으로 가 버린 사람', `안녕', `당신', `비 내리는 명동', `마지막 잎새', `영시의 이별' 등 주옥같은 노래 300여 곡을 발표하였다. 1968년 MBC 10대 가수상을 시작으로 해마다 KBS, MBC, TBC의 가수상을 휩쓴 당대 최고의 가수였는데 1971년 7월에 `마지막 잎새'와 `영시의 이별'을 내놓고 인기 절정의 순간 병마에 쓰러져 노랫말처럼 그해 11월 7일 미아리 자택에서 시린 생을 마감했다.

천상의 별이 된 그는 수많은 팬들의 애도 속에 어머니 유택이 있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신세계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2000년 11월에는 대중 가수의 이름으로는 최초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삼각지로터리 이면도로가 `배호길'로 명명되었고 전국 곳곳에 그를 기리는 노래비가 세워져 있으니 그는 가고 없어도 그의 불후의 노래는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의 노래는 대부분 노랫말에 비와 안개가 들어 있는 가슴 시린 서정성과 그가 지닌 중후한 중저음의 음색을 특유의 바이브레이션과 절정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고음을 구사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좋으니 국민애창곡이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이런 창법은 트로트의 전형이 되었고 그를 모창하는 가수와 음반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색깔 있는 검고 굵은 뿔테안경을 쓰고 때론 휠체어에 의지해, 때론 동료가수 등에 업혀 출연했던 그의 우수띤 모습이 수채화처럼 뇌리를 스친다.

찬바람이 분다. 마지막 잎새마저 기어이 떨구고야 말겠다는 듯이.

/시인·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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