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선루를 청주의 자부심으로 만든 민족운동가 김태희 선생
망선루를 청주의 자부심으로 만든 민족운동가 김태희 선생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11.2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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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청주 중앙공원에는 청주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가장 큰 건조물인 망선루(望仙樓 )가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된 이 건물의 원래 이름은`아름다운 경치에 취하는 누각'이라는 뜻의 취경루(娶景樓)다. 망선루는 `아름다운 선경(仙景)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이름만큼 당당한 모습으로 청주시민을 맞이하고 있다.

고려 공민왕도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족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파천했다 돌아오는 길에 청주에서 수개월 머물렀는데, 그 기념으로 청주 관아에서 문과 과거시험을 본 뒤 합격자 명단을 이곳 취경루에 붙였다고 한다. 이때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 이가 바로 조선왕조를 실질적으로 설계한 정도전이었으니 청주 망선루가 주는 의미가 새롭게 느껴진다.

취경루는 세조 때인 1461년에 청주목사 이백상이 새롭게 수리했으며, 한명회가 이름을 망선루로 바꾸었다. 이름이 바뀐 뒤에도 망선루는 여전히 청주읍성 안에 있는 아름다운 건물로 청주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건물이다.

그런데, 1921년 일제가 경찰의 무술 수련 공간인 무덕전을 건축하면서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이때 다행히 망선루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 아니라 망선루가 20세기에 청주의 교육 및 문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도록 한 인물이 있었다. 이분이 바로 1877년 청주 탑동에서 출생하여 신학문을 공부하고 근대 문명에 눈을 뜬 신지식인 김태희 선생이다.

김태희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30년대까지 청주지역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간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근대민족교육을 통해 청년들을 민족의 희망으로 길러낸 인물이다. 당시 청주청년회 회장이자 청주읍교회 장로였던 김태희 선생은 망선루가 일본인의 손에 의해 사라지는 일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망선루 건물을 옮겨서라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청주시민들의 모금으로 돈을 조달하여 청주읍교회에 이전하여 복원한 것이다. 그 후 세광중·고등학교, 청신고등공민학교 교사로 사용됐으며, YMCA회관, YWCA회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 대한보이스카웃의 전신인 청주삼각소년단 등 여러 단체와 기관이 망선루를 활용하였으니, 망선루는 명실상부하게 일제식민지 치하 청주지역의 근대교육과 문화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김태희 선생은 1909년에 남형우·신백우·김동삼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면서 민족독립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몰래 보냈고, 1920년 9월부터는 상해 임시정부 연통제의 충청북도참사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서들을 배포하는 등 국내 독립운동의 공작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 청주지역의 민족운동도 김태희 선생이 중심이 된 청주청년회가 주도하였는데, 1923년 전국적인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청주지부장 등으로 1931년까지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청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중앙공원이다. 필자는 시내를 갈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중앙공원에 잘 생기고 당당한 망선루를 찾는다.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망선루를 이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게 만든 김태희 선생을 생각한다. 암울했던 그 시절 청년이 희망이라는 생각으로 조선의 청년 한명 한명을 민족의 등불로 키워낸 김태희 선생과 한마음으로 이를 지원한 청주시민께 감사한다. 조상의 혼과 정신이 서려 있는 망선루에 자랑스럽게 올라서서 청주 시민의 자긍심을 마음껏 느껴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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