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의 시
낙엽의 시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11.2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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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늦가을을 지나 초겨울에 접어들면 세상은 온통 낙엽 천지다.

산에도 들에도 길에도 집 마당에도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나뒹구는 것이 이 철이다.

이러한 낙엽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생명의 유한함과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쓸쓸함, 추억, 향수와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조선(朝鮮)의 시인 신위(申緯)는 낙엽을 보고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낙엽시(落葉詩)

天地大染局(천지대염국) 천지는 거대한 염색 가게
幻化何太遽(환화하태거) 허깨비처럼 바뀜이 어찌 저리 급할까?
丹黃點飄蘀(단황점표탁) 발갛고 노란 잎들 점점이 날리어 떨어지고
紅素吹花絮(홍소취화서) 붉고 흰 꽃들은 버들솜 되어 날리네
春秋迭代謝(춘추질대사) 봄과 가을은 번갈아 바뀌고
光景兩無處(광영양무처) 빛과 그림자는 둘 다 머무름이 없네
空色顚倒間(공색전도간) 공(空)과 색(色)이 뒤바뀌는 사이로
冉冉流年去(염염유년거) 성큼성큼 세월은 흘러가누나


시인은 초겨울 어느 날 들판이나 산속을 거닐고 있었던 듯하다.

발 닿는 데마다 낙엽이 밟히고, 눈앞으로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런 모습에 시인의 상념은 끝없이 이어졌다.

풀이고 잎이고 꽃이고 할 것 없이, 한결같이 잿빛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목도한 시인에게 천지는 하나의 거대한 염색 가게였다.

모든 것은 실상은 없지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인 허깨비였다. 빨갛고 노란 단풍도 떨어져 무의 세계로 돌아가고, 붉고 흰 꽃들도 버들 솜 되어 바람에 실려서 역시 무의 세계로 돌아갔다.

봄과 가을은 교대로 나왔다가 들어가고 한다. 빛과 그림자는 둘 다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바뀌어 간다.

공(空)과 색(色)이 아예 거꾸로 되어 나타나는 사이로, 오직 세월만이 변함없이 흘러간다.

이 모든 것을 시인은 낙엽을 통해 깨닫고 있으니, 낙엽이야말로 세상 이치를 가르쳐주는 무언의 스승인 셈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허깨비와 같은 것임을 알 때 인간은 겸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초겨울이면 온 세상에 넘쳐나는 낙엽을 보고 쓸쓸함에 잠길 일만은 아니다.

도리어 자연의 섭리를 눈으로 보고, 이를 계기로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겸허한 삶의 자세를 갖출 수 있다면, 말라빠진 낙엽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생생한 삶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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