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계(稽)의 미학 그리고 광장의 촛불
골계(稽)의 미학 그리고 광장의 촛불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6.11.15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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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말이 죽었다. 왕이 끔찍하게 아끼던 말이었다. 애 닳기 그지없던 왕은 속 널과 바깥 널을 갖추어 대부(大夫)의 예로 장사를 지내도록 신하들에게 명하였다.

마땅치 않았으나 `(말에 대해)간하는 자가 있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서슬에 겁먹은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우맹이라는 자가 나타나 `대부의 예로 장사지내는 것은 박하니 임금의 예로 장사지낼 것을 청합니다'라며 대성통곡한다.

놀란 왕이 방법을 묻자, 옥을 다듬어 속 널을 만들고 무늬가 있는 가래나무로 바깥 널을 동원해 무덤을 파고 노약자로 하여금 흙을 지게 해 무덤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우맹은 한 술 더 떠, 주변나라의 대표가 호위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며 만 호의 읍으로 받들게 하라고 청한다.

왕이 뒤늦게 잘못을 깨우치니, 우맹은 육축으로 장사를 지내고 부뚜막과 가마솥을 바깥 널과 속 널로 삼아 화광(火光)으로 옷을 입혀 사람의 창자 속에 장사지내도록 바로 잡았다.

사마천의 사기 <골계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무엇이 됐든 과하면 독이 된다는 것을 반어적 표현을 통해 깨닫게 한 사례가 된다.

광장에 촛불이 물결을 이루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공중파와 종편 등 개그 프로그램에 숨어 있던 두더지 인형이 튀어나오듯 느닷없이 풍자가 넘친다.

불편하고 비열하다. <개그콘서트>를 비롯해 등의 패러디는 풍자일 수 없고, 따라서 해학을 통해 가감 없이 비판하는 용기와도 너무 멀리 있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무차별, 무분별한 블랙리스트와 서슬 시퍼렇던 권력에 숨조차 쉬지 못했던, 그리하여 불편부당함에는 짐짓 헛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외모이거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협한 놀림으로 일관해 왔던 그동안이 아니었던가.

국민 절대다수로부터의 저항이 터져 나온 뒤끝에서, 그리고 그런 끈 떨어진 권력을 비꼬는 조롱에 앞서, 그동안 말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골계의 미학에 대해 겸허한 반성을 먼저 하는 용기가 차라리 청량할 수 있음을 모르는가.

골계(稽)는 말 잘하고 유창하여 막힘이 없음을 뜻한다. 예로부터 우리는 재미있고 우스운 `말'이나 `짓'으로 웃음을 이끌어 내며, 일반적인 사회 인식과 현실 사이의 어긋남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골계를 삼아 왔다. 하기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민상토론'이거나 `LTE뉴스'등의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전파를 타게 됐다는 사실 하나로도 광장과 촛불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로 자위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풍자와 해학, 기지와 반어법의 `골계의 미학'에 사무쳐야 했을 대중예술인들이 그동안 스스로의 자기검열에 숨어 침묵하고 있었음은 아닌지에 대한 고백을 먼저 했어야 한다.

`웃음'을 생명으로 여기는 대중예술인을 점잖은 말로 골계가(稽家)라고 부른다. 익살꾼이라는 국어사전의 뜻이 있다.

대중예술인의 뒤늦은 비꼼과 촛불광장의 풍자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숨겨오고 감춰왔던 욕망의 분출구인 동시에 그릇된 권력에 대한 해학을 통한 바로잡음이 광장에 있다면 골계가는 대중에게 풍자를 통한 깨달음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다.

축제로 표현되는 주말 촛불의 광장에 넘쳐나는 풍자가 아무래도 짧게 끝나지 않을, 긴 외침의 이어감을 위한 카타르시스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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