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와 땡감
홍시와 땡감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6.11.1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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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임현택

감 따기가 한참이다. 어르신(지인)댁 뒤란에 반은 울타리를 넘어 길가로 길게 늘어선 감나무. 둥글 넙적한 감이 해거리를 하면서도 올해엔 주렁주렁 많이도 열렸다. 망태기를 옆에 차고 기다란 장대 끝에 그물망을 묶어 홍시를 따느라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장대를 휘젓고 있는 어르신. 그 옆에 할머니도 고개를 젖히고 이곳저곳 바라보며 훈계하시느라 덩달아 바쁘시다. 땡감을 딸 때면 장대 끝을 십자모양으로 잘라 그 사이에 감나무 가지를 끼워 살살 비틀어 가지를 꺾어 따는 숙련된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감 따는 도구가 다양하지만 예전 방식대로 감을 따는 어르신 입가에 수확의 기쁨이 번진다. 간혹 바닥에 툭툭 떨어져 홈이 파이고 흠집이 생겨도 썰어서 말리면 그만이라며 여유로운 표정이다. 삶의 연륜일까. 장대를 움켜잡은 손은 심줄이 툭툭 튀어나오고 거칠어 보이는 검으직직한 굵은 손마디와 계절과 어울리지 않은 두툼한 옷을 입은 노년의 삶의 흔적이 묻어난다.

소싯적 가장 흔하게 먹었던 홍시. 바구니 가득 담긴 홍시를 감나무 아래에서 털썩 주저앉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 씨를 반으로 쪼개보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유년시절 홍시를 먹고 나면 감 씨를 반으로 쪼개 그 속에 들어있는 숟가락 모양이 제대로 나오면 그날 운수가 좋고 숟가락모양이 일그러지거나 부러지면 운수가 사납다했다. 어머니는 감 씨 속에 숟가락이 제대로 나오면 살림도 잘하고 시집을 잘 갈 것이라고 덕담을 해 주셨다. 아마도 조심스럽게 감 씨를 쪼개야 하므로 여자들에게 조신한 몸가짐을 당부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감 씨 속의 숟가락처럼 생긴 모양이 이파리가 되고 손잡이처럼 긴 모양이 줄기가 되는 감 씨의 배아를 알기보다는 어른들의 시집을 잘 간다는 소리가 더 좋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가 되어보니 작은 일에도 덕담으로 아름다운 삶을 영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물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바닥에 흙과 뒤범벅이 된 깨진 홍시를 정리할쯤 짧은 해가 홍시처럼 감나무에 걸렸다. 붉은 노을이 반사된 얼굴은 모두가 홍시처럼 붉게 변한 낯빛을 보며 거실에 빙 둘러앉아 망태기 가득한 감을 침 들릴 요량으로 단단한 땡감을 선별했다. 오목한 바가지에 소주를 붓고 땡감을 살살 굴려 감꼭지가 흠뻑 젖도록 굴려 비닐봉지에 담아 한쪽에 보관했다. 소주와 땡감이 어떤 궁합인지 알 수 없지만 소주에 굴린 땡감을 며칠 숙성시키면 감의 떫은맛이 없어지고 단감처럼 달달한 감으로 변신한다. 예전 어머니는 팔팔 끓인 물에 소금을 넣어 짭짭하게 만들어 항아리 속에 땡감을 넣고 그 물을 부어 며칠 동안 이불을 덮어 숙성시켜 침시를 만들어 먹었다. 주전부리가 귀한 그때에는 침시도 아껴먹어야 했다. 지금 소주에 떫은맛을 없앤 감은 색깔이 선명하여 먹음직스럽지만 예전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침시는 뜨거운 소금물을 부어 검은색을 띤 못난 감이지만 그때의 그 맛을 지금에는 맛볼 수가 없는 아련한 기억속의 맛이 되어 버렸다. 계절이 한발 앞선 산자락의 마을. 넙적한 감 이파리가 다 떨어지고 잔가지 끝에 군데군데 매달려 있는 시체와 까치밥으로 남아있는 감은 삶의 그림이다.

치열한 현실속의 젊은이들의 삶. 땡감처럼 단단하지만 떪은 맛이 나는 미숙한 단계로 아직 풀지 못한 삶의 답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들의 삶의 길목이다. 반면 대문 밖이 저승길이라 하는 어르신들의 삶은 감나무 끝에 애처롭게 매달려있는 홍시와 흡사하다. 삶의 긴 여정의 어르신. 고난의 시간을 딛고 홍시가 되기까지 세상이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아서 홍시처럼 익어가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군자라 해도 노년기는 서러워지는 만년이라 하는데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다가 아닌 것처럼 무소유처럼 염화미소를 띤 어르신의 달달한 연시 같은 삶이 노을빛 속에 이어간다.

감나무에 오르거나 감을 따먹는 꿈은 하고 있는 일이나 사업에 좋은 성과가 있다고 하니 오늘밤엔 좋은 꿈을 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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