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가을을 캐며
붉은 가을을 캐며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 승인 2016.11.10 17: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고구마 줄기가 보자기처럼 가득 펼쳐져 바람결에 일렁이고 있었다. 밭고랑에 즐비한 줄기를 그물 당기듯 당겨 밭둑에 모으고 비닐을 걷어 냈다. 호미를 들고 고구마를 캐기 시작했다. 땅을 팔 때마다 머리통만 한 고구마가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마치 푸른 바다에서 올라오는 붉은 물고기 떼를 연상하게 했다. 내 손으로 난생처음 심고 수확해보는 고구마다. 고구마가 땅에서 올라올 때마다 심봤다를 외치며 흙을 뒤졌다. 산삼을 캐는 심마니의 마음이 이랬을까. 들뜬 마음에 고구마를 어깨 위 얼굴로 올리고 사진을 찍으며 싱글벙글했다.

고구마 캐기에 한창 혼을 놓고 있는데 밭 가를 지나가던 이장님이 한마디 거든다. 고구마는 큰 게 잘 된 것이 아니라고. 큰 것은 튀김용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거라고.

그럼 어떤 게 좋은 거냐고 묻자 주먹만 한 것이 상(上)품이라고. 그렇게 크게 고구마를 키운 건 농사를 잘 못 지은 거라고. 내가 심은 고구마는 왜 이렇게 큰 거냐고 묻자 간격을 너무 멀리 심어서 그렇단다. 내년에는 간격을 좀 촘촘하게 심어보라며 이장님은 뒷모습을 보인 채 터벅터벅 밭길을 거어 갔다. 어느덧 하늘엔 노을 한 자락 깔리고 있었다.

고구마가 비록 크게 자랐고 수확량도 한 상자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 손으로 처음 고구마를 수확하는 거라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고구마를 다 캔 후 밭을 정리하고 돌아서려는데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녁노을 아래 돌들이 차갑게 뒹구는 빈 밭을 본다. 이랑에 찢긴 폐비닐이 곡소리처럼 펄럭이며 내 눈길을 잡았다. 상가처럼 휑한 고구마밭이 노을 속에서 쓸쓸히 누워 있었다. 밭둑에 걷어 놓은 고구마 줄기는 저녁 바람에 말라가고 있었다. 말라가는 고구마 줄기 위로 밀잠자리 한 마리가 맴을 돌다 날아가고 노을빛이 커튼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한때는 알차게 여물어 가는 붉은 고구마를 다독이며 그 위를 든든하게 지켰을 고구마 잎 사이로 시들어 가는 줄기들이 혈관처럼 붉다.

바구니를 들고 와 고구마 줄기를 똑똑 따서 담는다. 풀벌레 모두 숨 놓은 밭은 제 몸속에 가득했던 고구마를 다 들어내고 겨우내 홀로 뒤척이리라. 지난 계절의 기억들을 홀로 새기며 조용히 눈발 속을 지새우리라.

똑똑 떨어져 담기는 국수 가락 같은 고구마 줄기를 보며 밤새 고구마 줄기를 까서 김치를 담가주시던 어머니의 마디 굵은 손이 스친다.

추수된 빈 밭처럼 휑한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가득하다. 자식들에게 모두 다 내주고 홀로 뒤척이는 내 어머니의 가슴 밭. 텅 빈 볍씨처럼 얇아진 몸으로 홀로 가슴 밭을 일구고 있을 내 어머니.

자식을 위해 수없이 비워야 했던 어머니의 밭. 모든 것을 비움으로써 비로소 채워지는 어머니의 텅 비어서 그득한 마음 밭. 곁에 두기 위해서 곁에 두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서녘 하늘 붉게 번지고 있는 울컥이는 노을 사이로 어머니의 얼굴이 가득 퍼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