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으로 시작… 진심 하나로 미국 사로잡은 거인
세일즈맨으로 시작… 진심 하나로 미국 사로잡은 거인
  • 안태희 기자
  • 승인 2016.11.08 1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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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것 없던 자동차용 걸레 패션화 아이디어 전략 적중

차량용 털이개로 美시장 30년간 제패·80개 제품 수출

괴산에 공장설립 생활용 청소용품 내수시장 강자 예고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에는 ㈜샤이닝이라는 회사가 있다. 청주~충주간 국도변에 위치해 있는 작은 회사지만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자동차용 먼지털이개(더스터)를 제조하는 회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놀드 스왈제네거, 실베스터 스탤론 등 유명 영화배우가 광고모델이 된 `샤이닝 더스터'는 미국에서 30여년간 연속으로 판매 1위를 한 글로벌 제품이다. 30명의 직원이 연간 300만개를 제조하며 미국판매 1위, 전 세계 차량용 먼지털이개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샤이닝.

그러나 이 회사에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한몸에 안고 자란 청년이 미국의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때까지 겪은 `스펙터클'한 스토리가 숨겨져 있었다.

가난한 유복자로 태어나 세계적인 기업가로 우뚝 선 성공신화의 주인공 이필희 ㈜샤이닝 회장(65). 청명한 가을 하늘이 가득한 날, 카리스마와 열정으로 가득 찬 그를 만났다.

◇ “진심 하나로 살아왔다”
이 회장이 현재의 위치에 본사를 잡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공장은 선친이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학살 때 희생된 자리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선친의 넋을 위로하고, 6대 독자로서 고향을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고조할아버지가 신기리라는 마을을 만들었으며, 큰아버지는 북이면장을 지낼 정도로 뼈대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7개월 후인 1951년 유복자로 태어난 이 회장은 급격히 기운 가세 때문에 행상을 해야 하는 어머니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할머니의 손자교육은 철저했다.

할머니의 가르침은 삶의 지표가 되었다. 이 회장은 “내가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뿐인데, 무엇을 더 보여줄 것인갚라면서 “오직 나는 진심이라는 한 단어로 살아왔다. 수십 년이 흐르면서 진심은 신뢰를 불러왔고, 신뢰는 결실을 맺어주었다”고 말했다.

◇ 장사 안 되는 가게에서 일하다
그는 대길초와 주성중을 졸업한 뒤 청주상고(현 대성고)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택한 곳은 서울이었다. 큰물에서 커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상경한 이 회장은 1970년대 명동거리에서 양화점 직원이 됐다.

명동에서 양화점을 하고 있던 친구 매형을 만나러 갔다가 친구 매형이 돈통에서 많은 돈을 꺼내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이것이구나'라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 매형을 졸라 바로 다음날부터 월급도 없는 양화점 직원으로 일했다.

그는 당시로는 생소한 `고객관리'를 했다. 손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록했다. 맞춤 구두를 찾으러 오라고 전화를 하게 될 고객이 1000여명에 이르렀다. 서비스란 용어가 낯설었던 시절, 맞춤형 고객서비스를 하니 당연히 `미스터 리'의 소문이 퍼졌다. 고객 1000명의 명단을 가진 그는 업계의 샛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스터 리'는 명동에서 점점 유명한 세일즈맨이 됐다. 여러 점포에서 그를 스카우트하려는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선택은 엉뚱했다. 장사가 잘 안돼 월세도 못 내는 양화점에 스스로 찾아갔던 것이다. 다른 양화점에서 1년 급여를 선불로 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쪼그라드는 양화점을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나만의 영업스타일을 실험하고 싶었다. 언제까지 남의 가게 종업원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고객들이 나를 찾아왔다. 진심이 통한 것이다. 고객과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때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그의 철저한 고객관리는 더욱 빛을 발했다. 월세도 못 내던 양화점은 순식간에 매출 1위 업체가 됐고, 그의 도전은 성공했다.

어느 날, 이필희 회장에게 잊을 수 없는 전화가 왔다. 당시 명동에서 부자로 소문난 사람이 양화점 사장직을 제안한 것. 명실상부한 `사장'이 된 그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 초심을 잃지 말자
이필희는 또 한 번 중대한 결심을 했다. 수산업에 투자하면 큰돈을 벌 것이라는 지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강원도 묵호로 떠난 그가 빈털터리가 되는 데는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돈 2억4000만원이라는 거금이 모두 사라지고, 버스비조차 없는 신세가 됐다.

실패의 길이었지만, 이필희는 배짱이 두둑했다. “원래부터 가진 게 없었는데, 무엇을 더 잃을 게 있나?”라면서. 그는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수산업에 대한 투자실패는 또 다른 도전의 시작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이필희는 친지에게 급전 200만원을 빌려 재기에 나섰다. 미국에 있는 친구가 자동차 왕국 미국의 사정을 설명한데다, 보잘것없던 자동차용 `걸레'를 패션화시키면 성공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그는 1983년 경기도에 전광(全光)이라는 회사를 열었다.

친구 편에 미국에 몇 개 보낸 털이개에 미국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곧이어 바이어가 한국으로 날아왔다.

“손에 쥐기 편하고, 귀엽게 생긴 털이개가 먼지를 빨아들이는 것을 본 미국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없었다. 길가에서 그냥 한번 차량을 닦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고 `이거 어디서 살 수 있느냐'라고 물었으니까.”

드디어 1985년 전광이 만든 차량용털이개(지금의 더스터)가 미국에 상륙했다. 이 당시 이 회장은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작은 컨테이너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털이개 7500개를 만드는데 직원들과 함께 25일을 꼬박 매달렸다. 쪽잠을 자는 것 말고는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면서 만들었다. 이렇게 컨테이너 1개, 2개로 늘어난 물량은 결국 미국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 직관력, 글로벌 기업을 만들다
샤이닝이 지금처럼 미국시장에서 독보적인 기업이 되고, 전 세계 80개국에 제품을 수출할 수 있었던 데는 이 회장의 미래에 대한 고도의 직관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적재산권, 특허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던 지난 1990년 중반에 이 회장은 특허를 내기 시작했다.

“사업이 잘되는 것은 좋았는데, 중국제품이 우리 제품의 4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으로 미국시장에 쏟아지기 시작했다”면서 “샤이닝 제품의 우수성이 특허로 보장받지 못한다면 결국 짝퉁이 진품을 누르는 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이 회장은 회상했다.

현재 미국특허 25개를 비롯해 모두 80개의 특허를 확보했다. 중국 등 후발주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는 무기를 마련한 것이다.

◇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도전
세계시장을 석권하며 탄탄한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이 회장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현재 내수 본사와 중국에 공장을 두고 있으며, 미국에 판매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이 회장은 앞으로 괴산에 4만㎡의 공장을 추가로 설립해 생활용 청소용품 등을 생산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젊은이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역경이 있기 마련입니다. 역경을 이기려는 노력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인생의 가치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안태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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