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가을날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11.0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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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봄이 꽃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단풍은 곱긴 해도 꽃처럼 소생의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단풍은 아무리 고와도 쓸쓸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이처럼 꽃의 생기가 아쉬운 가을에 피는 꽃이 있으니, 국화가 바로 그것이다.
국화는 예부터 은자(隱者)의 꽃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매화와 더불어 선비들이 애호하던 꽃이기도 하다.
조선(朝鮮)의 시인 권우(權遇)에게도 국화는 가을의 꽃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던 듯하다.

 

가을날(秋日)

竹分翠影侵書榻(죽분취영침서탑) 대 그림자 파랗게 책걸상에 앉고
菊送淸香滿客意(국송청향만객의) 국화는 맑은 향기를 보내 나그네 마음을 가득 채우네
落葉亦能生氣勢(낙엽역능생기세) 뜰 앞에 지는 잎 뭐가 좋은지
一庭風雨自飛飛(일정풍우자비비) 쓸쓸한 비바람에 펄렁대누나


늦가을 어느 날 시인은 자신의 서재에서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료함은 오래갈 리 없었다. 왜냐하면, 대나무며, 국화며, 낙엽 같은 늦가을 손님들이 시인의 서재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창밖의 대나무였다.

그림자가 검정 외에 다른 빛깔이 있을 리 없지만 시인의 눈에는 대나무라는 형상만으로 그 빛깔이 비취색으로 느껴지는데, 그 그림자가 책을 얹어 놓은 책걸상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시인의 서재를 찾아온 것은 바로 국화였다. 국화 또한 앞의 대나무처럼 몸이 직접 온 것은 아니었다. 대나무처럼 그림자가 들어올 만큼 키가 크지도, 서재에 가까이 있지도 않았지만 서재에 들어오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윽한 향기가 문틈으로 들어왔는데, 그것만으로 그 존재감을 입증하고도 남았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서재를 찾은 것은 낙엽이었다.

낙엽은 대나무나 국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인에게 다가왔다. 그림자로 눈에 보이거나, 향기로 코에 맡아지거나 한 것이 아니고 소리로 들려온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낙엽의 소리가 쓸쓸하다거나, 쇠락의 느낌을 주거나 하는,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도리어 생기를 띠고 마치 기분이 좋아서 웃는 소리로 시인에게 다가온 것이다. 비바람에 풀죽을 법도 하지만, 흥에 겨워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는 소리가 참으로 경쾌하다.

가을은 단풍과 낙엽의 계절이지만, 꽃의 계절이기도 하다. 화려함보다는 은은함이 돋보이는 국화는 스산해지기 쉬운 가을을 꾸며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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