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물들 때
나무가 물들 때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6.11.0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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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세상이 화려하다. 나무가 매일매일 변신을 한다. 땅 위로 뒹구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들이 순식간에 대로변에서 비명횡사다.

`바스락, 빠스락, 퍽, 푹'

잎들의 비명에도 나무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다른 잎마저도 하나둘씩 떨구어 내기 시작한다. 낙엽들은 길 위에서 열 조각 백 조각이 난다. 그래도 나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눈을 질끈 감고 만다. 어미의 마음이 아비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순간이다. 아직도 떨구어 낼 잎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나무는 가슴을 꼭 부여잡는다. 그래, 이별은 아픈 거지. 잎들은 나무를 원망하며 스러져 간다. 더 추워지기 전에, 눈이 오기 전에 나무는 그렇게 잎들과 많은 이별을 할 것이다. 그래, 이별은 슬픈 것이라고. 그렇게 잎들과 이별을 하면서 나무는 가슴에 멍이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멍든 가슴은 한겹두겹 두꺼운 갑옷으로 만들어 나무를 성장하게 만드리라.

나무가 잎들과의 이별에 앞서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잎들로 가는 수분 통로를 막는 일이다. 그것은 나무의 생존 방법이다.

힘들지만, 아프지만, 슬프지만, 잎들과의 이별을 일사천리로 해 버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잎들이 고통에 치달아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며 환호하지 않는가. 어떤 잎은 노랗게 신열을 앓는 모습으로, 어떤 잎은 피가 온통 얼굴로 퍼진 채로, 어떤 잎은 미쳐 준비도 못 해 푸른색으로, 나무에 매달려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잎들은 이별하는 모습도 다르다.

이별이 힘든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별은 꼭 슬프지만도 나쁘지만도 않다. 이별이 왜 아름다운지는 나무의 모습을 보면 될 일인 것을. 자신의 이익 앞에서, 권력 앞에서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나무가 잎들과의 이별을 단행하는 순간 더 아름다워지듯이 사람 또한 자신의 온몸에 붙은 욕심을 버릴 때 최고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진리다.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될 때, 욕심이 과하다고 생각할 때,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갔다고 느낄 때,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될 때. 그때가 자신의 겉치레들과 단호히 이별을 할 때이다. 겉치레와도 같은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 스스로의 가슴에서 박수를 받으리라.

내 나이도 이제 가을로 들어섰다. 그동안 나를 푸르게 빛나게 해 주었던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다. 그것이 겨울로 들어설 내 인생에 대한 준비라는 것을 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욕심을 지녔는지는 이별을 할 때 알 수 있다. 아깝다고 미련을 버리지 못할 때, 서러워 눈물이 날 때, 뒤를 돌아보며 발을 떼지 못할 때, 깊은 밤 그리움에 잠 못 이룰 때, 그 모습들은 이기심의 자화상이며, 너그러움의 배면이다. 누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했는가.

오늘도 호모 사피엔스는 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본다. 그러다 가늘게 떨고 있는 나무의 수관에서 전해지는 말을 경청한다. 그 순간에도 나무와 잎들의 이별이 한창이다. 그것이 종국에는 승화의 작업인 것을…. 호모 사피엔스는 고개를 주억인다. 매서운 겨울을, 고독의 시간을 잘 버틸 수 있도록 나무와 호모사피엔스는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로 한다.

잠시 후, 호모 사피엔스가 혼잣말을 한다. 나무가 물들 듯, 사람도 물들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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