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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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6.11.0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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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넓은 의미에선 사실적인 내용을 담은 필름을 모두 다큐멘터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회적으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명쾌한 견해에 비중을 둔다는 식의 핵심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죠.

주말 연휴 같은 때, 보고 싶었던 TV의 다큐 프로를 찾아 다시 보는 일이 아주 즐겁습니다.

어디 TV뿐이겠습니까? 입맛이 솔솔 당기는 다큐 영화 소식을 듣게 되면, 개봉하기도 전에 설레발치곤 했답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도 `워낭소리(2008)'도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2014)'도 `위대한 침묵(2005)'도 `울지마 톤즈(2010)'도 `말하는 건축가(2011)'도 `달팽이의 별(2012)'도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4)'도, 다 말할 순 없고 물론 `집으로...(2002)'도 그랬답니다.

최근엔 `물숨(Breathing Underwater, 2016)'이란 다큐 영화가 저를 마구 흔들어 놓았지요.

많은 분이 다큐의 위기에 대해 말을 하며 걱정합니다. 잘 나가는 상업 영화와 재미와는 거리가 먼 다큐 영화가 맞붙기엔 다분히 역부족이긴 하죠.

그래도 `물숨'만큼은 다른 것 같습니다. 거의 9년에 가까운 제작 기간을 견뎌낸 고희영 감독의 이 영화를 보면서, `제주 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를 간절히 기대했을 정도이니까요.

다큐 영화 `물숨'을 보고는 다음과 같은 후기를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바다에 머무르는 방법은 숨을 멈추는 겁니다.

자맥질로 물속을 드나드는 해녀의 노동은 `물질'이란 말로 표현되죠. 물질은 숨을 멈춘 상태에서 긴박하게 진행됩니다. 숨이 곧 목숨이니,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게 해녀의 일상인 셈입니다.

뭍에 사는 우리도 숨을 참아야만 할 때가 있긴 하죠. 숨바꼭질하다가 술래가 다가오면, 들키지 않으려 숨을 참기도 하잖아요. 숨을 꼭 참고 있으면 영혼의 꼭지까지 꽁꽁 붙들어 맨 듯이 몸이 풍선처럼 두둥실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기도 해, 두려움의 높이가 가파른 절벽처럼 세워지고 말죠.

그러니 숨을 참는 바다에서야 오죽할까요. 두려움이 바다 밑바닥을 마구 헤집고 파헤쳐 놓을 테니, 멀쩡한 눈으로도 시야를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끼니도 거른 채 하루 8시간의 물질을 하는 때도 있는 해녀의 뱃가죽은 고무옷에서 자꾸 멀어지기만 해 더욱 출렁거리고 맙니다.

2분 이상 숨을 참고 15~20m 깊이의 바다에서 물질하는 상군해녀에게선 망망대해에 떠 있는 고달픈 배 한 척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먹고살려고 들어간 바다가 어느 날엔 돌연 무덤이 되기도 합니다. 잘라내지 못한 욕망의 숨이란 물숨(물속에서 쉬는 숨)을 들이마시는 날이 그런 날이죠. 욕망을 움켜잡으려는 순간, 물숨에 사로잡히고 마는 겁니다.

물숨이 들락날락하는 바다로 가야만 하는 숙명을 안고 사는 사람이 곧 해녀입니다.

바다가 밥이고, 집이라는 88세의 어느 해녀는 자신을 먹여 살린 게 바다라서 바다가 좋다는 말을 아끼지 않습니다.

제주도에선 바당이라고 부르는 바다가 해녀의 평생 삶이 꽃피고 지는 마당이니까요. 아기에게 생명의 젖을 물린 어머니와도 같으니까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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