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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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6.11.0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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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수필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와이퍼가 빗물을 쓸어내리는 사이사이 눈으로 들어오는 들녘 풍경이 고요하다.

추수가 끝난 빈자리가 쓸쓸한 들에는 드문드문 무리지어 핀 감국들이 떠나는 가을빛을 잡고 있다. 노란빛이 어린아이웃음처럼 해사하다.

차가 산모롱이를 지날 때마다 옆 사람의 무게가 고스란히 쏠리며 옆구리가 따스해 온다. 일 년에 두어 번 보는 사이니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인연인지라 건너오는 온기가 조금쯤은 쑥스럽다. 예기치 않은 일정이다.

독서토론 진행차 방문했다 뜻이 맞아 차를 마시러 가는 길이다. 독서동아리 회원 중 꽃차와 자연 발효 식품을 만드는데 일가견 있는 분이 즉석 초대를 하셨다.

꼬불꼬불 시골길을 돌아 도착한 마당엔 검은 깃털이 간간이 섞인 토종닭 한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한다. 집 주변은 온통 꽃밭이다. 시간의 흐름이 내려앉아 시드는 꽃잎들이 내리는 비와 잘 어우러져 가을의 정취를 담고 있어 숨어 피는 새 꽃이 오히려 생경하다.

뒤꼍 작은 토방에 둘러앉아 따끈한 차를 마신다. 오늘 급작스런 초대의 빌미를 제공한 목련차다. 딱 한 번 목련차를 만든 적이 있다. 등불처럼 봄을 켠 봉오리를 따는 것이 미안해 꽃차는 포기했지만 차 맛은 잊을 수 없다 했더니 주인장이 비도 오는데 그 목련차 한잔 대접하겠다고 나선 것. 깊어가는 가을 빗소리 사분사분 들리는 방에 앉아 봄을 마신다. 정성스레 덖어 말린 목련꽃은 노오란 치자 빛이다. 상큼한 맛이 따뜻하게 몸 안으로 스며든다.

차를 나누는 모습들을 슬쩍 건너다본다. 함께 자란 오랜 벗 같다. 차 마시는 모습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는 주인장. 환갑을 넘어 60대 중반으로 가는 길목에 선 그녀는 자연 속 여유가 가져다준 선물인지 맑은 피부에 온화함이 가득하다. 차 한 잔의 인연이 어디서 왔을까. 참 감사하다.

토론 후 한편씩 돌려가며 낭송했던 정현종의 <방문객> 시 한 구절이 가슴에서 살아난다.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마음/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



한 사람의 일생이 온다는 말에 가슴 뭉클했었다. 함께 꽃차를 나누며 조근조근 나긋나긋. 다섯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 하모니를 이루며 시월의 하루를 건너가고 있다.

요즘 차마 할 말을 잃게 만든, 우리를 온통 혼란에 빠뜨린 대통령의 인연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도 모르게 그 깊은 뿌리가 드러나길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길다는 생각을 한다. 가만히 창을 여니 어느새 비는 그치고 비거스렁이로 바람은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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