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 이창옥<수필가>
  • 승인 2016.10.3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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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가을 하늘빛을 듬뿍 머금은 햇살이 거실 깊숙이 들어와 자리를 펼쳐놓았다.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다육식물들이 경쟁이라도 하는 듯 제 몸을 가을 햇볕으로 곱게 분칠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올여름 유난히 무더운 날씨를 견뎌낸 아이들이다. 오랜 시간 시련들을 이겨낸 아이들에게서는 세월의 향기와 기품이 넘친다.

그 모습은 볼수록 경이로워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품 있고 향기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면 얼마나 좋을까”혼잣말을 하고는 한다. 그리고 늘 고민한다.

나는 잘 늙어가고 있는 것인지를.

물론 사람과 다육식물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다육이라고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도 않다. 내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며 돌보지 않으면 아이들은 금세 벌레들의 습격을 당하기도 하고 짓무르기도 하면서 생기를 잃어간다. 수시로 들여다보며 물주는 시기를 조절하여 물을 듬뿍 줘야 할 때와 때로는 튼실하게 키우기 위해 물을 굶기기도 한다. 세월의 향기와 멋진 맵시를 위한 일종의 담금질인 셈이다.

그러나 사람은 늙어 가면서 기품 있게 나이를 먹어 간다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사람의 기품 있는 자태와 향기는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가꾸며 담금질하는 일은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다.

김준엽 시인은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 하겠습니다/

시인은 주문을 걸 듯 끊임없이 묻고 또 물으며 스스로 다짐과 각오를 담금질한다. 열심히 살았느냐고, 상처를 준 일은 없느냐고, 삶이 아름다웠냐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묻는다. 그것은 김준엽 시인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살아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실에 펼쳐 놓은 햇살이 자리를 거둬 베란다로 옮겨 앉았다. 햇살 머금은 다육이들의 멋스럽고 빛나는 모습에 눈길을 거둬들이기가 쉽지 않다.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걸었다. 미세하게 바늘 긁히는 소리와 함께 음악이 흐른다.

오래전에 즐겨 듣던 영화음악 모음집이다. 이사할 때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싸들고 다녔던 몇 장 안 되는 음반 중 한 장이다. 음악 소리가 거칠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소리보다 때로는 이 바늘 긁히는 소리가 그립고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요즘은 리듬이 빠른 음악보다 느리고 감미롭게 흐르는 음악을 자주 듣는다. 나 역시도 나이를 먹어 가고 있다는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

지금부터 나도 나에게 묻고 또 물을 것이다. 열심히 살고 있느냐고, 혹시 누구에게 상처를 준 일은 없느냐고, 자신과 사람들을 사랑하느냐고, 그리고 정말 행복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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