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 아래서 아상을 지우다
밤하늘 아래서 아상을 지우다
  • 이영숙<시인>
  • 승인 2016.10.3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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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이영숙<시인>

산국향을 좇아 움직이다 보니 발길 닿은 곳이 모교 교정이다. 학부 시절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받은 스승님을 뵈었다.

늘 언제나 환한 모습으로 품어주시는 스승님, `님의 말씀'으로 우주와 대자연을 환유한 시집 두 권을 선물 받아 돌아오는 길, 어둠 드리운 푸른 하늘에 슈퍼문이 뜨고 하나 둘 별이 차오른다.

허공은 비어 있으므로 품을 수 있는 공간이다. 서로 빛과 어둠을 주고받으며 순환하는 우주의 고리처럼 서로 음양으로 흐르면서 전경과 배경으로 그리 살 순 없을까.

아파트 정원수로 한몫을 다 하는 나무에서 붉은 꽃사과 한 알이 데굴데굴 발아래로 `툭'떨어진다. 옷깃으로 문지른 후 살짝 깨 물으니 제법 단맛과 신맛이 조화롭다. 후미진 자리에서도 작은 행성으로 잘 살았다는 흔적이다.

나무 벤치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얼마 만에 보는 하늘인가. 어둠이라는 배경이 있어야 비로소 드러나는 존재들, 허공은 비어 있지만, 결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온종일 아이처럼 쓰고 지우고 분주하던 하늘이 까무룩 잠들 무렵이면 비로소 `우주의 잔별들이 거스름돈처럼 손바닥에 내려앉는다.(김소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들의 가슴에 별이 뜨는 순간이다. 별이 들어와 박힌 자리만큼 삶의 무게도 저만치 뒷걸음친다.

오랜만에 문탠(moontan) 하는 시간이 길다. 달과 지구, 태양이 일직선일 때 생긴다는 슈퍼문이 고향 집 엄마처럼 둥글게 떠오른다. 두 눈이 흔들리는 만큼 별들은 반짝이고 달빛은 출렁인다. 삶을 스쳐 간 무수한 인연들이 달빛을 배경으로 파노라마를 일으킨다.

스승님의 글처럼 행여 나도 `하늘을 잃어버린 문명인, 허공을 모르는 도시인, 별들을 잃어버린 실내인' 완전한 직립(直立이 덜 된 어정쩡한 인류일지도 모른다. 하늘 보는 일이 뭐가 어렵다고 땅강아지처럼 땅만 보며 살아왔는지 고개가 무겁다.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 가면 밤하늘을 원형 그대로 볼 수 있는 `밤하늘 보호구역'이 있다고 한다. 그곳이 국제밤하늘협회(IDA)에서 아시아 쪽에 지정한 첫 번째 에덴마을 이라니 참신한 소식이다. 한번쯤 찾아가 고철 같은 아상을 지우고 원시의 하와처럼 뛰어다니고 싶다. 삶이 빼곡한 노동이 아니라 가끔은 낭만일 수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

여름내 뜨거웠던 붉은 꽃사과 열매도 수은등 아래서 초롱처럼 더욱 붉다. 저마다 홀로 물들고 찬바람에 흔들리면서 오롯한 `진아'로 회귀하는 계절, 된서리 맞아야만 붉게 익는 열매들에서 삶의 진미를 읽는다.

좋은 씨앗을 뿌리고 뜨거운 여름날의 인내를 견디며 각자가 빛나는 존재가 돼서 노현자처럼 발효하며 `참나'가 되는 가을, 하늘처럼 사계의 기로 순환하며 이기의 상을 만들지 않는 무상의 삶이 잘 사는 길이다.

구름처럼 흩어지고 물처럼 풀어질 무상한 것들에 대한 미련을 키우며 속절없이 다다른 생의 반환점, 살아간다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일이며 산더미 같은 욕망을 하나씩 허물어가는 여정이다. 다시 돌아가는 길은 전신이 등불인 달처럼 푸근하고 넉넉한 품을 만들면서 둥글둥글 가야겠다.

가벼움으로 부유해지는 가을밤엔 `디오게네스의 항아리'에서 자유롭게 달빛을 즐기는 치기어린 낭만도 여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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