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소나기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6.10.2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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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더블린의 오래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바이킹의 후손들이 사는 나라라서 왠지 거칠 것 같다는 선입견은 아름다운 도시를 보면서 사라졌다. 모든 건축물은 옛 건물들의 높이에 맞춰져 있어 햇 것보다는 묵은 것에 집착하는 나를 중세시대로 데려다 놓는다. 아득한 과거가 현재에 공존하는 도시는 걸어도 지치지 않았다. 무겁던 목적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5세기에 건립한 세인트 패트릭성당 안에는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나단 스위프트와 그의 연인이 잠들어 있고 1030년, 노르만의 지배하에 목조건물로 지어져 현재는 석축으로 신축한 클라이스트 처치성당 안에는 헨리 8세 시대의 의상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어 놀라웠다. 지하에는 시대별로 다른 납골묘가 있어 그들의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헨델이 메시아를 처음 연주했다는 1095년에 건립된 성미한교회안의 오르간을 보고 감동을 안고 밖으로 나오자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작가박물관을 향하는 중이었다. 급하게 어느 카페의 처마 밑으로 들어섰다. 부풀었던 마음이 비와 함께 가라앉기 시작했다. 언제쯤 비가 그칠 것인가 조바심하는 나와는 달리 거리의 많은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그냥 비를 맞기도 하고 티셔츠에 부착된 모자를 쓸 뿐이다. 가던 길을 서두르지도 않았다.

청주의 변두리에 살던 나는 한 정거장거리에 있는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기차통학을 했었다. 열여섯의 여름, 어느 날이었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통학열차를 타자마자 소나기가 세차게 내렸다. 나는 열차 난간에 서서 바람에 밀려들어 오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그냥 비를 맞는 게 좋았다. 간이역에서 내려 솔밭 길을 걸어 집으로 갈 때 하늘은 물방울 하나 내리지 않았다는 듯 멀쩡했다. 젖어 있는 것은 한결 싱그러워진 나뭇잎들과 흙길과 나였다.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 있는 하늘과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예민한 사춘기였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나는 소나기의 풋풋한 자연의 소리와 느낌이 좋았었던 같다. 어쩌면 소나기가 내린 후에 나타나는 무지개를 더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고비를 넘지 않아서 고운 빛의 무지개 위에 꿈을 얹고 미래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즐거움만 컸던 시절이었다.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나이가 되자 비 내리지 않는 하늘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 내리는 것이 싫었다.

요즘은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도 피할 곳이 많다. 차 안에 우산 하나쯤은 넣고 다녀서 걱정이 없다. 그러나 인생의 소나기는 대책이 없다. 준비 없이 고스란히 맞아야 한다. 내 인생의 소나기가 그랬다. 세찬 바람과 함께 내리면 삶의 뿌리까지 흔들렸다. 생로병사가 그랬고 가끔은 타인과의 관계가 그러했다. 고통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미리 예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서 살아 있는 동안은 온몸으로 맞고 젖은 몸이 마르기를 기다릴 뿐이다. 인생의 소나기는 지나가도 무지개는 쉽사리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타국의 낯선 도시에서 만난 소나기가 이방인을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다. 십여분 내리던 굵은 비가 가늘어지자 무지개가 선명하고 가깝게 떴다. 오랜만에 보는 경이로운 풍경이다.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부풀기 시작했다. 소나기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느긋함이 편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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