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과 신천영, 그리고 청주 상당산성
이인좌의 난과 신천영, 그리고 청주 상당산성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10.2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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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영조 즉위 4년째 되던 1728년 3월 15일 조선 전체를 뒤흔든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충청도 괴산 사람 이인좌는 자신의 모든 노비 약 1000여 명을 방면한 후 영조에 의해 독살된 경종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정통과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이인좌의 난 또는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이인좌가 이끄는 봉기군은 상여에 무기를 숨기고 청주읍성 북문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청주목 병영 내의 관청 기생 월례를 포섭하여 영내 병마절도사 이봉상을 비롯한 장병들에게 술을 먹여 만취하도록 만들었다. 때문에 봉기군은 상여에 무기와 총포를 싣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청주성을 입성하여 함락시킨 것이다.

이들은 청주읍성을 접수하자 성안에 있던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 중영의 우두머리 남연년, 비장 홍림을 살해했다. 병마절도사였던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이었다. 이인좌가 이봉상을 충무공의 자손이라 반란에 가담시키려 세 번이나 권유하였으나 “조상의 충의를 잊을 수 없다”며 거부하고 당당하게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는 패장이었음에도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충민공의 시호를 받고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당시 이봉상의 숙부 이홍무 역시 반란군에 잡혔으나 절개를 지키며 죽어 역시 추증됐다.

이인좌는 여세를 몰아 청주, 안성, 죽산, 평택지역의 세력을 구축하여 봉기군을 집결시켜 상당산성을 접수했다.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축성된 이후 단 한 번도 점령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이인좌 난으로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인좌는 권서봉을 목사로, 청주 출신 신천영을 병사로 임명하고 관곡보관창고를 헐어서 골고루 배급해 민심을 얻게 되어 수많은 백성이 봉기군에 가담했다. 스스로를 대원수라 지칭한 이인좌는 곳곳에 격문을 만들어 붙였는데,`소현세자의 적통혈손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구호와 `한 사람의 무고한 백성도 죽이지 않는다. 재물을 빼앗지 않는다. 부녀자를 겁탈하지 않는다.'는 강령을 내세우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장례행사를 재실행하고 민심을 돈독히 다졌다.

당시 봉기군의 충청병사가 된 신천영은 상당산성을 접수하고 성내에 머물면서 경상, 호남지역 봉기군과 연락하면서 이인좌가 대원수로서 혁명군이 안성 쪽으로 진격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병과 물자공급을 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봉기군이 패배하고, 청주성 내 배반자와 창의사 박민웅에게 사로잡혀서 교수형을 당했는데, 청주성을 함락시킨 지 12일 만이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정도를 세워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꿈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봉기의 주동자 이인좌는 능지처참을 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후 박문수는 삼남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삼남암행어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밀풍군 탄은 봉기군들이 왕위로 올리려 한 탓에 옥에 갇혔다가 신하들의 사사하라는 상소에 못 이긴 영조의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자살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상당산성 남문 아래 무신창의비가 우뚝 서 있다. 무신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의병들의 이름과 그 뜻을 기리기 위해 2008년에 세운 비석이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새로운 시대를 소망하며 다른 쪽에 서서 목숨을 걸었던 이인좌와 신천영 등 비운의 조상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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