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추억
빛바랜 추억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6.10.2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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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가을비가 내리는 밤이다.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 앓이를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자인 난 가을 앓이를 하고 있나 보다. 자정이 넘어가고 있는데도 겨울인 냥 가슴이 시리다. 비 내리는 이 밤, 가슴속에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어둠 속에 바투 다가온 가로등 불빛 사이로 거세게 내리꽂는 빗줄기를 한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찬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병풍처럼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 속에 호젓한 우리 마을, 비 내리는 날이면 간간이 적막을 깨는 자동차 라이트불빛이 창문에 얼비추고 있다.

고요함이 깊어지면 핸드폰 음악 어플리케이션(application)을 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책꽂이를 훑어 내린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묵은 시간을 뒤적였다. 책꽂이 맨 아래 두툼한 사진첩, 초등학교 웅변대회, 사생대회, 백일장 등 수상 사진들과 상장들이 빛바랜 사연을 간직한 채 구석 맨 끄트머리에서 보일 듯 말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늘 그 자리 그곳에서 가지런히 두 아들의 흔적을 차곡차곡 품고 있다.

어린이날 행사, 웅변대회, 백일장 등 각종 행사가 개최되는 날이면 아이들보다 외려 내 마음이 더 파도타기를 하며 분주했다. 저학년 때에는 백일장에 참가하는 것이 학교 수업을 빠지는 데 의미를 두었기에 신바람 난 악동들은 이른 아침부터 먼저 서둘렀다. 고학년이 되면서 낯가림 때문인지 쭈뼛거리며 아이들 표정이 달갑잖을 때도 있지만 난 그럴듯한 말로 부추겨 아이들 마음을 구슬려 백일장에 참가하기도 했다. 어찌 매번 좋기만 하겠는가. 때론 우시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를 달래가며 싫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행사장에 끌고 가다시피 참가한 적도 있었다.

백일장, 사생대회가 공지되면 달력 뒷면은 스케치북과 원고지대용으로 풍경화가 만국기처럼 펼쳐지고 그림만큼 소매 자락은 크레파스로 얼룩이 졌다. 산문과 운문을 쓸 때면 문예창작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이들의 머리는 고개 숙인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기도 하고 때론 해맑은 얼굴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심을 하는 모습에 아이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족하고 있었다.

대회에서 상장이라도 받는 날이면 거사를 치르기라도 하는 양 문구점으로 달려가 코팅을 하여 연결고리에 줄줄이 엮어 벽마다 도매하다시피 했다. 맹모삼천지교도 아니고 그저 부질없는 나의 욕심을 채우려 아이들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엄마의 치맛바람으로 따라왔다.

살 같은 세월, 웃음이 가시는 내 얼굴엔 잔주름이 자글거리고, 혼기에 든 장성한 두 아들의 수상내역은 언제부터인가 상장 그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사할 때도 보물처럼 꼭꼭 여며 보관했던 상자, 빛바래 누렇게 변색된 상장은 책꽂이 한쪽에서 고요를 품에 안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너무나 깊이 잠든 탓에 모두가 잊고 있었던 묵은 시간들, 아이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아주 곤하게 잠들어 있다.

과학과 문명이 발전하면서 최첨단 시대에 사라져가는 앨범, 희미한 삶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 같아 왠지 모를 아픔이 되어 가슴을 짓눌러 가을 앓이처럼 가슴앓이가 되어 먹먹하다. 빗소리와 묵은 시간이 거리낄 것 없이 어우러지는 이 밤, 연신 마른 세수를 하고 삶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장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만일 추억중에 하나만 간직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어떤 것일까. 상장을 들고 달려오는 아이들이 빗소리에 보였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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