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귀로 울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귀로 울어야 한다
  • 정현수<칼럼니스트>
  • 승인 2016.10.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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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정현수<칼럼니스트>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고 적힌 티셔츠가 시중에 등장했다. 제작자는 인터넷 만화 「연애의 정령」에서 편의점 알바가 이 티셔츠를 입고 갑질 손님에게 당차게 대드는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

만화에 나오는 알바는 손님들이 반말로 주문하면 반말로 주문을 받는다. 손님이 계산대 위에 돈을 던지면 거스름돈도 똑같이 던져서 준다. 알바를 해본 청년 독자들은 만화 속 알바의 대처 방식에 통쾌해했다. 청년 알바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공감을 얻은 이 티셔츠는 만화를 벗어던지고 현실 세계로 걸어 나왔다.

편의점이나 음식점에서 알바들이 감내해야 할 욕설과 폭언, 폭행의 심각성은 이미 도를 넘었다. 대중은 자식 같은 알바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분노했지만 이렇다 할 대책과 행동은 없었다.

청년 알바들은 어른들의 권위에 짓눌릴 수밖에 없다.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고용 불안과 돈이면 안 될 게 없다는 천박한 자본 의식, 나이로 서열을 결정하는 성숙하지 못한 전통문화가 갑질이라는 괴물로 변태한 것이다. 돈 몇 푼으로 알바들의 영혼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야! 어이! 이봐!” 같은 반말과 하대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한해 54만 명의 신입생들이 국내 대학에 진학한다. 이들 모두가 학비 걱정에서 해방되어 공부만 하다가 취직하는 건 아니다.

태어나 보니 부자인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등록금은 해마다 오르고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최저 임금을 겨우 웃도는 비정규직이 대부분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의 아이도 이 글을 읽는 그대의 아이도 편의점이나 음식점 알바를 피해갈 수 없다. 바야흐로 알바가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아버지의 폭력 속에 자란 아이들이 그 폭력을 저주하면서도 결국은 닮아가는 것처럼 갑질은 이를 경험한 약자들이 학습하고 전파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위험인자다.

또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모습을 띤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계층을 현상화해서 공동체의식을 약화시키고 사회적 자존감을 저해한다. 청년들의 인권은 미숙한 자본 구매력 앞에서 무참히 침해당하고 있다. 시급 몇천 원을 위해 졸린 눈을 비비고 아픈 다리를 두드리며 하루를 살아내는 팍팍한 삶이 청년들의 공통된 스펙이 되었다.

국어사전에 갑질이란 단어가 아직은 없지만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전에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억울함을 나타낼 수 있는 마땅한 말이 없었다. 억울함은 분명하고 선명한데 적확한 말이 없었으므로 드러내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서처럼 우리가 이름 짓기 전에는 그것들은 다만 하나의 재수 없는 몸짓과 말들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의 행동을 갑질이라 불러주었을 때 그것은 약자들에게 분노가 되었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의 추운 발소리를 듣는 아비는 잠결에 귀로 운다는 슬픈 문장이 얼마 전 손석희의 앵커 브리핑에 소개되었다. 김주대 시인의 부녀(父女)라는 제목의 시였다. 그대는 새벽에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아이의 추운 발소리를 들을 자신이 있는가. 듣고도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아이는 아닐 거라 외면하지 마시라. 이 시대의 청년들은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방탄복처럼 입어야 한다. 편의점이나 음식점에서 여리고 추운 허리를 새벽까지 숙여야 한다. 아! 우리는 모두 귀로 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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