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의 환상
파랑새의 환상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6.10.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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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걸까. 혼자 있을 때면 셀카 놀이를 즐겨하고, 페이스북의 커버사진 또한 계절마다 바꿔 놓는다. 그렇지만 옷을 입을 때는 연한 파스텔 톤을 좋아하고 약간 어두운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지인들과 찍은 단체 사진을 보면 언제나 뒤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어릴 때 나는 주로 남자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위로 오빠가 둘이 있던 것도 한 몫을 차지했다. 언니는 첫째였고, 나는 막내였다. 그리고 중간에 오빠 둘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주로 내 바로 위의 작은 오빠와 놀기를 좋아했다. 여름이면 작은 오빠와 나는 우리 집의 지척에 있던 저수지에서 수영하고 놀았고, 가을에는 집 뒤의 산에 올라가 밤과 도토리 등을 줍거나 따며 놀았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도 여자아이들과 노는 것보다 남자 아이들과의 놀이를 더 즐겨 했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팽이치기, 나무타기 등은 내 어린 시절 기억들이다. 지금도 옛집 뒤란 어디쯤에는 그때 엄마 몰래 묻어 둔 구슬들이 있을 것이다. 사춘기가 오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치마를 입고부터는 남자들과 어울리는 놀이를 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심리에세이 『사람풍경』에 보면 인간은 태내에서 리비도를 자신의 신체에 투사하는 시기부터 나르시시스트이며, 아기 때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전지전능하게 해결해 주는 엄마의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나르시시즘 성향을 강화한다고 한다.

그러한 아기의 나르시시즘은 성장하면서 리비도적 감각, 욕망, 정서 등을 외부의 대상과 나누는 과정에서 약해진다. 하지만 그 시기에 아기를 정서적으로 보살피고 공감해줄 대상이 없으면 아기는 그 욕망과 감각을 자신의 내부로 돌려 나르시시즘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나의 부모는 아이를 돌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맏이인 언니의 등에서 자랐다. 그리고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는 오빠들이 우선이었고, 딸들은 살림 밑천이라고 믿는 분이셨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남자가 되고 싶은 선망, 남자들을 통해 내 삶이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했던 마음. 내가 그토록 남자인 오빠와 놀기 좋아하고, 남자 아이들의 놀이를 즐겨 했던 건 오직 그것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남자가 될 수 없었고, 아버지로 인해 공부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남자가 되고 싶었던, 내 안의 `아니무스'덕에 자력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찾았고, 지금도 `정신적 가치'를 찾기 위해 열심히 그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희망, 행복, 그것은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파랑새의 꿈이다. 모리스 마테를링클은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라면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행복의 가치가 가변성이기 때문에 그 무게감 또한 시시각각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꿈꾸는 것이 환상 일지라도, 혹은 파랑새가 신기루일 지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태고 적, 남자가 되고 싶었던 어느 소녀의 간절한 소망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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