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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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10.1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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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술 익는 마을이라는 시가 있다. 술은 익어야 한다. 발효되어야 한다. 미생물이 설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잘 썩으면 익은 것이고 잘 못 익으면 썩은 것이 된다.

된장도 잘 익고 썩지 말라고 바람이 통하게 매달아 놓는다. 수분이 너무 많으면 썩으니 바람의 힘을 빌린다. 생선도 마찬가지다. 굴비를 걸어놓는 것도 같은 원리다.

바닷가에 가서야 말린 생선의 위력을 알았다. 잡아온 생선을 말리는 것이 냉장고와 같은 보관기구가 없던 시절의 일반적인 생활방식이었다. 대구도 말려서 꾸득꾸득하게 먹고, 민어도 그런다. 거제도에 사는 할머니의 정성이 담긴 덜 말린 대구도 선물로 받아보았고, 강화도에 사는 할머니의 엄청 큰 덜 말린 민어도 답례로 받아보았다. 대구는 신선한 대구를 더 좋아하는 할머니의 아들 덕분에 얻어먹었고, 민어는 내가 그 아들에게 햇녹차를 보내주자 그 답례로 보내온 것이었다.

내 입맛에는 이런 생선이 별미였다. 그러나 말린 생선이 갖는 독특한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은 좋아할 맛이 아니었다. 된장을 좋아한다면, 생선을 된장을 찍어 먹는 경상도 사람이라면, 매운탕도 된장탕으로 끓이는 바닷가 사람이라면 넉넉히 좋아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 유명한 마산 아구찜도 본디 퀴퀴한 말린 아귀를 썼다. 입 큰 것이 아귀(餓鬼)같아서 아귀인데 아구라 부른다. 바닷가에서 사람들은 말린 아구가 지닌 고린내를 즐기며 찜을 먹었다. 그러나 요즘 아구찜은 모두 싱싱한 아구찜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구찜 본점도 말린 것과 생것을 모두 판다. 알아서 선택해 먹으란다.

사실 발효란 문명의 꽃이다. 정주하면서 가능해진 먹거리다. 농경문명이 자리 잡으면서 인류가 탄생시킨 위대한 유산이다. 발효를 할 줄 모르면 인간이 아니다. 호랑이고, 코끼리고, 소다. 인간, 그들은 발효시키는 동물이다.

중국술 가운데 죽엽청주(竹葉淸酒)라는 것이 있다. 대나무 냄새가 나고 단맛이 강한 술인데, 처음 중국술을 접하는 사람은 매우 좋아한다. 술꾼은 결국 그 단맛 때문에 싫어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전설에 따르면 원숭이가 대나무 통 속에 담긴 물을 먹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 만든 술이 바로 죽엽청주라고 한다. 유인원, 그들 역시 발효시키는 동물인가 보다.

우리는 막걸리를 만들었다. 막걸리는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느 부족도 비슷한 술을 만든다. 일본에서도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을 가본 적이 있다. 가끔은 곱게 걸러 상품화시킨 것도 눈에 띈다.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안 먹는 술이 있다. 그건 살균탁주로 이름붙인 끓인 막걸리다. 그 막걸리는 막걸리에 대한 모독이다. 막걸리는 살아있어야 하는데 죽이다니, 그건 막걸리가 아니다. 구황(救荒) 식품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말 좋은 막걸리는 오래 둘수록 맛이 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식초가 되어야 한다. 술로 식초 만드는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라서 포도주로 만드는 발사믹(balsamic) 식초가 서양에선 유명하다. 우리도 예전에는 막걸리로 식초를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막걸리 가운데에서도 내버려두면 초가 되는 막걸리가 있다. 시중에 파는 막걸리는 인공첨가물이 많은 까닭에 초산발효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술만큼은 처음에는 쌉쌀할지라도 냉장고에 오래 둘수록 단맛이 돈다. 이름하야, 송명섭 막걸리다. 무형문화재가 만든 막걸리다. 그러나 동료에게 주면 쓰다고 싫다는 사람이 태반이다. 아, 사람만이 아니라 술과의 불화, 이를 어쩌랴!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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