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내리다
뿌리내리다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6.10.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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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안희자<수필가>

아침이면 습관처럼 화단 앞을 서성인다. 여름부터 쉼 없이 피어나는 꽃들 때문이다. 울도 담도 없는 아파트 화단 귀퉁이에 각기 다른 이름의 꽃이 오종종 피어 있다.

여린 꽃잎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이슬을 머금은 꽃잎의 빛깔은 더욱 곱다. 손바닥만 한 꽃밭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꽃구경은 공짜다.

고운 빛깔과 향기에 취해 여름 한철을 보냈다. 꽃이 닫힌 마음을 열게 한다. 작은 꽃밭이지만 거기엔 다양한 꽃들의 세상이 있다. 우주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엔 금계국이 한창이다. 앵두처럼 붉은 베고니아도 앙증맞고 바람 따라 나비처럼 살랑대는 연분홍빛 사랑초도 요염하다. 은은한 향을 품고 다붓다붓 피어 있는 샐비어 꽃도 사랑스럽다.

강한 생명력 때문일까. 녀석들은 지난 더위에도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땅내를 맡기 전까지 심한 몸살을 앓았다. 더러는 비바람에 찢기며 생채기도 났다.

계절은 깊은 가을로 치닫고 있다. 지난여름을 이겨낸 꽃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메마른 땅에서도 애면글면 인고의 꽃을 피워낸 고귀한 생명이다.

꽃은 언제 어디서든 조건과 환경을 탓하지 않고 화합한다. 저마다 원산지는 달라도 서로 어울려 무리지어 피고지고, 이윽고 척박한 땅에 뿌리내린 것이다.

요즘 사람들의 결혼관에 나이와 국경의 벽이 없는 것처럼 식물도 그만큼 빠르게 적응하고 싶은 걸까. 아침나절 꽃밭에 서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이 새파란 청춘들 같아 자꾸 눈길이 간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모여 하나의 꽃밭을 이룬 것처럼 지구촌이란 말이 실감이 나는 시대다.

더불어 다문화가정도 늘고 있다. 문득 연분홍빛 사랑초 사이로 화사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겹쳐진다.

이웃에 살고 있는 그녀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젊은이다. 나이에 비해 앳된 그녀는 세 살배기 아들을 둔 직장맘이다. 그녀가 퇴근할 때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서툴지만 한국말로“안녕하세요?”라며 인사한다. 웃음매도 곱다. 체구는 작지만 그녀는 시어머니를 내 부모처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산다. 나라 간 문화적 차이며 고부관계가 힘겨울 터인데 직장생활까지 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가. 언젠가 그녀는 나에게 직장생활이 고단해서 이직을 해야겠다며 심경을 토로했다.

추석이 지난 어느 주말이었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목격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 그녀가 꽃밭에 앉아 아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한국말이 아닌 모국어로 부르는 게 아닌가.

노랫말은 알 수 없지만 애절한 리듬과 그녀의 표정에서 외로움을 읽었다. 애타게 고향이 그리웠으리라. 나 역시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리워서 성묘길에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았던가.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살던 곳보다 이곳 생활환경이 풍요롭다 해도 낯선 땅에서 뿌리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녀가 머나먼 곳에서 날아와 다시 일구는 자리는 험하고 척박하다. 이 땅에 뿌리내리려 온몸으로 버티는 그녀 모습은 애처롭기만 하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많이 아팠으리라. 그녀의 아픔에 손을 내밀어 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것이 전부라는 게 애석할 뿐이다.

나는 이 저녁 꽃밭에 앉아 노래하던 모자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감성을 느낄 줄 아는 이웃이 있어 행복하다. 아무리 꽃이 예쁘다 한들 사람만 하랴. 나는 그녀가 이방인이 아닌 영원한 한국인으로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응원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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