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의 한인 마을 토교와 화상산 공동묘지를 찾아서
충칭의 한인 마을 토교와 화상산 공동묘지를 찾아서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10.12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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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기약없는 독립을 향한 소망과 기대로 한 평생을 고난의 시절을 보낸 독립 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 중국 대륙을 갔다. 한평생, 그리고 대를 이어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신 위대한 선열들의 흔적 앞에 저절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라는 암살 영화의 대사가 기억나는 독립군의 발자취를 발견하는 순간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오로지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고, 행복한 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사명 하나로 온갖 고생과 시련을 견디고 이겨낸 선열들의 노고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끝없이 이어진다. 자신들의 목숨보다 미래 자랑스런 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선각자들의 희생과 노력이 오늘날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무려 27년 동안 중국 대륙에서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청사를 10여 차례 이상 이동하면서 말이다. 특히 감사한 것은 중국 국민당 정부이다. 일본군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그것도 패전을 당하면서 자신들의 앞 가름도 못하는 처지에서 약소국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했다는 점이 엄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독립 운동가들은 자신의 소신과 사명감 하나로 어려운 상황을 견디며 살 수 있었지만 그 가족들은 무슨 죄(?)로 그런 고생을 해야 했던가?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인 충칭의 연화지 청사를 답사한 후 임시정부 가족들이 살았다는 한인 마을을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 가족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은 임시정부 청사와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한적한 충칭시의 외곽에 있었다. 안내문이나 소개 자료에도 잘 나오지도 않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작은 마을이다. 우리는 토교라고 알려진 충칭의 변두리 시골 마을을 찾아갔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과 마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야산이었다. 이제는 철강회사의 공한지로 변한 곳인데 우리는 무성하게 잡풀들이 우거진 그 속에서 한인 마을 표지석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먼지로 뒤덮인 한인 마을 표지석을 손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아 보았다. 그리고 숲 풀 속 모기들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잊지 않으려는 작은 정성으로 비쳐졌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묘지를 찾아갔다. 화상산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이분들은 그렇게 그리던 고향에 가지 못하고 결국 남의 나라에서 죽어간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가는 곳 화상산 공동묘지, 답사단 일행들은 공사 중이라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길도 없는 언덕을 멀리서 하염없이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광복 후 독립 유공자들만 고국으로 돌아가고 남은 주검들은 머나먼 타국에서 흩어지고, 훼손되어 먼지가 되어버린 그들…. 못난 후손이 죄송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속으로 삭이며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화상산을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하루속히 통일되어 이분들의 죽음을 결코 헛된 죽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다시는 후손들에게 이런 비극적인 나라를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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