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엄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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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경은<충북기독병원원무과>
  • 승인 2016.10.1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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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배경은<충북기독병원원무과>

지난 2월, 따뜻한 햇볕을 받은 거뭇한 가지에서 작은 매화꽃이 조금씩 생기를 머금을 즈음 그녀를 처음 만났다. 구별을 위한건지 차별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는 그녀를 미혼모라고 부른다.

모자원 10평도 안 되는 그녀의 집엔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아들의 장난감과 유아용품들이 널려져 있고 곧, 봄이라고는 하지만 집안의 유리창마다 에어캡으로 둘러진 것이 추운 겨울을 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삼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처음부터 미혼모는 아니었다. 혼인무효소송으로 무참히 버려진 사건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자신을 스스로 돌보지 못할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심했던 그녀는 결국 아들을 두 돌이 다 되어갈 때쯤 보육원에 맡기고 말았다.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았고 당장에 먹고살 일이 막막했으나 무엇보다 아들을 시설에 맡긴 죄책감으로 정신적인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아들을 다시 데리고 왔다. 안타깝게도 아들은 엄마와 헤어진 뒤 분리불안으로 언어장애가 생겼다. 심리적인 요인이 크기에 주민 센터와 연계하여 아이가 언어치료와 놀이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는 건강염려증과 우울감, 무기력증으로 자활기관에도 자주 결근했다. 어떤 날은 불안해서 미칠 것 같다며 전화기를 붙잡고 울기도 했다.

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평생교육원에서 진행하는 플로리스트 수업을 추천했다. 감사하게도 사회적 약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으로 무료로 수강할 수 있었다. 아이의 주1회 언어치료로 고달팠고 본인의 몸이 아픈 날은 결석하기도 했지만 수업을 들으며 조금씩 생기를 찾는 듯이 보였다. 더욱 다행인 것은 아이가 말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발음교정이 더 필요하고 어휘력은 또래에 비해 떨어지지만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엔 좋아지리라는 소망을 품는다. 하루는 아이가 내게 안기며 어린이집에서 배웠노라고 간단한 동요를 불러주는데 하마터면 울 뻔했다. 이 감동적인 노래를 그녀는 이제 매일 듣고 있다고 한다.

상담을 하다 보면 경청과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그녀는 길지 않은 삶의 여정을 실수와 그로 인한 고통의 시간 속에서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마음을 쏟아 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었다.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나던 상담시간이 점점 소망의 말들이, 웃음이, 농담이 자리를 잡으며 나도 함께 기뻤다.

집에 돌아와서도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좋은 글귀나 힘이 될 만한 말들로 그녀의 에너지를 보탰다. 아들을 다시 데려와 책임지기로 한 것이 얼마나 위대한 모성인지, 또한 스스로에게 밑바닥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몸부림이 얼마나 경건한 삶의 자세인지 말해주었다.

계약기간이 다 되어 이제 곧 모자원을 비워주어야 한다. 1년 전에 영구임대 아파트를 신청했는데 다행히도 모자원 퇴소날짜와 얼추 맞아떨어진다. 지금도 몸이 아픈 그녀는 이사할 체력도 비용도 해결할 수 없어서 자원봉사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아직, 아무것도 완성된 것은 없다. 그러나 삭풍만 불던 쓸쓸한 영혼에 이제는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워내는 매화를 닮은 힘이 그녀에게 생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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