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에 그리움 하나
가을빛에 그리움 하나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6.10.1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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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뒤돌아본다. 발끝을 따라오는 아쉬움을 달래본다. 가을빛이 익어가는 어느 날, 동료와 함께했던 안동을 홀로 여행 하면서 훌훌 떨어내듯 비워내고 돌아오는 길목, 주유를 마치고 자동세차장에 차를 세웠다. 한참을 달려왔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그곳 끄트머리에 머물고 있었다.

여름날의 폭포처럼 차창에 하얗게 부서지는 비눗방울들, 그리고 세차게 뿌려지는 물줄기가 또다시 가슴을 뛰게 한다. 눈을 감았다. 또렷하게 들려오는 세차소리, 개운할 것 같았는데 차에 묻은 흙과 먼지를 닦아내는 브러시소리, 말끔하게 밀고 나가는 밀대가 여행의 여운마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 왠지 모를 서운함이 눈가에 어른거린다. 세차터널을 빠져나와 진공청소기 앞에 섰다. 난 추억까지 모두 빨려 들어갈까 봐 안간힘을 쓰며 청소기 손잡이를 힘껏 잡아 보지만 속수무책으로 미련 없이 빨려 들어간다. 광채가 날수록 그간의 추억 사라질 것 같아 세차흔적이 채 마르기도 전에 세차장바닥에 얼룩을 그리며 빠져나왔다.

미운정도 정이든가, 모든 일상생활을 함께하려고 하며 늘 같은 스타일 옷을 입는 그녀가 싫었다. 나를 따라하는 모습이 역겹던 지난날들 딱히 거절도 하지 못하면서 내 마음엔 미움의 보따리가 점점 커졌다. 같은 연배로 융합이 잘 될 것 같았지만 경쟁의식이 곤두선 우린, 의견충돌이 잦고 서로 주장이 강하다 보니 N극과 N극처럼 튕겨져나가 가까이 서면 밀어내기 바빴다. 외려 상반된 만남이 평생을 간다고 하더니, 동료의 직선적인 화법에 더 강한 공격적으로 화답하다 보니 냉대한 대화는 항상 평행선을 이루고 타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동료는 남편병환으로 퇴사했다.

소통의 불협화음이었던 동료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눈앞에 보이지 않자 내 눈길은 안정을 찾지 못해 허둥대기도 일쑤였다. 편해질 줄 알았는데 가시 같은 미움으로 독하게 찔러 됐던 시간들이 언제부터인가 나를 더 아프게 찔러 됐다. 아직도 핸드폰의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흔적이라 생각했다. 매사에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는데 눈길마다 동료의 때 묻은 흔적을 볼 때면 추억처럼 묻어나는 지난날은 연민일까. 내 마음의 중심부에 원초적으로 미움보다는 소통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움이 미움으로 변한 건 아닐까. 예전과 확연하게 다른 환경임에도 채워지지 않는 물병처럼 빈공간의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다. 미워하면서 어쩜 닮아가고 조금씩 미움도 사랑도 무뎌지면서 서로 마음을 읽어가면서 미운정이 들었나 보다.

가을을 재촉이라도 하듯 선선한 바람이 휩쓸고 간 거리엔 희미한 수은등이 켜지면서 어둠이 깊어진다. 화려한 네온 불 그리고 쇼윈도가 스쳐 지나간다. 현란함보다는 심플함이 좋고 크리스털의 도어보다 마음을 잡는 한옥의 문고리, 그리고 발 빠른 과학보다는 느림의 미학이 있는 안동이 또 보고 싶어진다. 아니 내 삶의 얼룩이라 생각했던 동료가 그리워진다. 언제부터인가 나풀거리는 레이스자락이 낯 간지럽고 블링블링 한들거리는 블라우스가 불편해지고, 딱딱해 자칫 고지식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정장패션이 편해지기 시작해졌다. 그렇게 감정이 무뎌지는 나이가 되자 얼룩 같은 미움도 그리움이 되어 쌓였다.

최준 시인은 “추억은 당시에는 `얼룩'이었을지 몰라도 결국은 `무늬'로 남아 있는 지난 삶의 흔적들이다.”라고 표현했다.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얼룩은 세월의 두께가 더해가면서 조각보 같은 그리움이 묻어나는 무늬였다. 가면 오고, 피면 지는 것이 자연의 순리처럼 그렇게 상처 위에 언제나 흉터가 남는 것처럼 동료는 아름다운 무늬로 내 가슴속에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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