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린 날
가을비 내린 날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10.1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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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비는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특히 가을비는 사람을 사색에 젖게 하고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 일상에 묻혀 살다가 어느 날 가을비를 만나면 문득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박은(朴誾)은 가을 어느 날 비를 만나자 친구를 떠올렸다.

빗속 친구 생각(雨中有懷擇之)

寒雨不宜菊(한우불의국) 찬비는 국화에 어울리지 않는데
小尊知近人(소준지근인) 작은 술동이는 사람 가까이할 줄 아네
閉門紅葉落(폐문옹엽락) 문을 닫으니 붉은 잎이 떨어지고
得句白頭新(득구백두신) 시구를 얻으니 흰머리가 새롭네
歡憶情親友(환억정친우) 정다운 벗 생각할 때는 즐겁지만
愁添寂寞晨(수첨적막신) 적막한 새벽 되니 시름만 더하네
何當靑眼對(하당청안대) 그 언제나 반가운 눈길로 만나
一笑見陽春(일소견양춘) 한바탕 웃으며 화창한 봄을 보리요?

가을이라 날씨가 부쩍 차가워졌는데, 거기에 비까지 내리니 쓸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당에 노랗게 핀 국화에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노라니, 시인의 심사는 착잡하기 그지없다.

저절로 술 생각이 나는데, 아쉬우나마 작은 술동이 하나가 제 알아서 눈에 들어오니, 이를 마다할 시인이 아니다. 술을 한잔 마시고 있노라니, 이런저런 상념들이 떠오른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어 문을 닫아 놓고 사는 집 마당에도 어김없이 붉게 물든 나뭇잎이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만족할 만한 시구를 하나 얻느라 애쓰며 보낸 세월이 만만치 않았던지, 문득 머리에 내려앉은 하얀 서리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다정한 벗들과 어울린 시간은 즐겁기 그지없었지만, 즐거웠던 만큼 그 후유증도 크다.

친구들이 떠난 새벽이 되면, 시름이 더 깊어지니 말이다. 그래도 시인은 찬비가 국화에 내려 술 한 잔을 하다 보니, 친구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빨리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 그 친구를 반갑게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면, 사람들의 마음은 부쩍 쓸쓸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술 생각도 나고 친구 생각도 난다. 이럴 때 친구가 찾아와 마당 국화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응시하며, 술 한 잔을 하면 말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저 생각하고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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