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탓 할 문제가 아니다
일본 탓 할 문제가 아니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6.10.0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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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무심코 덧붙인 한마디가 전체 발언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맥락을 뒤집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얼마 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두고 한 말이 그렇다. 그는 “반 총장이 성공적으로 임기를 끝낼 수 있도록 국내에서 더 이상 정치적 언급을 하지않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선의의 발언으로 풀이될 만 했지만 앞에 사족을 단 것이 시비거리가 됐다. “미국 언론에서 역대 최악의 사무총장이라는 비판을 받고있다는데...”라고 운을 뗀 것이다. 김 의원이 반 총장을 염려하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약점을 들춰내 깍아내린 것 아니냐는 해석들이 나왔다. 발언의 목적이 반 총장의 보호나 격려였다면 굳이 외신의 부정적 평가를 덧붙일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차기 대선의 유력한 여권 후보들이다. 관계가 이렇다 보니 한마디 무심한 첨언이 구구한 추측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발언의 본질을 곁가지로 친 한마디에 선명하게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아베 일본 총리는 지난 3일 중의원에서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 편지를 보낼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받아쳤다. 우리 외교부가 지난달 “일본 측이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상처를 달래는 추가적인 감성적 조치를 취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데 대한 응답이었다. 아베는 그냥 “생각한 바 없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털끝만큼도'라는 매몰찬 수사를 덧붙였다. 그가 악센트를 준 곳은 `없다'가 아니라 `털끝만큼도'였던 것이다. 단순한 거절로 그치기에는 우리 요구가 참기 어려울 정도로 황당했던 모양이다. 해서 그런 허황된 기대는 앞으로도 꿈도 꾸지말라고 한국 정부를 타박한 것이다. 자국 의원들에게 한 말이지만 우리 국민과 정부에 대한 무례와 오만이 뚝뚝 떨어지는 표현이다. 위안부와 소녀상 문제 말고도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않는 폭로성 발언들'에 연일 시달리는 상대국 외교 파트너의 처지는 전혀 배려하지 않은 무정한 발언이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이번에도 침묵했다. 국감장에 나온 주일대사가 “일본 현지에 주재하는 대사로서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대사는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이 위로금인지 배상금인지를 묻는 의원의 질문에도 답하지 못했다. 아베를 꾸짖는 따끔한 일침은 일본에서 나왔다. 고노 요헤이 전 일본 관방장관이 사죄편지를 거부한 것과 무례한 표현을 비판하며 `아베 총리의 인간성 문제'라고 질타했다.

지난해 12월 타결된 한·일간 위안부 문제 합의는 국내서 굴욕적 협상이요 면죄부 협상이라는 거센 비판을 샀다. 우리 정부가 예상되는 부정적 여론을 무릎쓰고 일본의 큰 혹을 떼어주었지만 답례는 매우 모진 방식으로 이뤄졌다. 한달도 안돼 아베 총리는 합의문에도 없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언급하며 “한국 정부에서 적절하게 대처할 것이고, 이전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압박하고 나섰다. 집권당의 한 의원은 공개된 회의에서 “위안부들이 직업적 매춘부들이었다”고 모욕했다. 외무성 한 관료는 “정부가 발견한 자료에서는 군·관에 의한 강제연행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고 아베 총리도 국제기구에서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가 없다는 이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군의 관여로 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데 대해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는 합의문의 핵심 조항을 뒤집는 발언들이었지만 우리 정부의 공식 항의는 들어보지 못했다.

가해자가 윽박지르고 피해자가 눈치를 보는 주객전도의 상황을 보는 국민들은 황망하다. 왜 구걸하듯 일본 정부에 사죄편지를 청탁하고 이런 모멸을 당해서 국민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느냐는 항변이 터져나오지만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본국에서조차 인간성을 의심받는 아베 총리지만 오바마를 불러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 위령탑에 고개 숙이게 하고 수세에 몰렸던 위안부 문제를 공세적 국면으로 전환해버린 외교적 수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20만명 중 10%에 달하는 2만명은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지금까지 이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사과 한 마디 없었고 히로시마를 방문했던 오바마도 지척에 있는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는 찾지 않았다. 일본의 무도만을 탓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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