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 이야기
쌀밥 이야기
  • 이수안<수필가>
  • 승인 2016.10.09 20: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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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

과수원 일이 뜸해지니 텃밭에서 거둔 채소로 자주 솜씨를 내 본다. 끝물 고추는 따서 멸치볶음 해 먹고, 가지도 살짝 쪄서 집간장에 무친다. 들기름 넉넉히 두르고 새우젓에 볶은 호박도 일미다. 청양고추 서너 개 썰어 넣은 된장찌개는 또 얼마나 입맛을 돋우는지. 바로 한 쌀밥에 된장찌개와 열무김치를 넣고 비비면 양푼 밥도 뚝딱이다.

원체 먹는 것을 좋아해 간식까지 마음껏 먹으며 신나게 보냈더니 아뿔싸, 뱃살이 심상치 않다. 거의 2년 가까이 노력해 감량한 체중이 두어 달 만에 원위치에 온 것이다.

저울이 바빠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올라가지, 식사 후에 올라가지, 화장실에 갔다 오면 또 올라가지…. 그래도 야속한 숫자는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밥을 적게 먹는 수밖에. 요즘은 반공기도 안 되는 밥을 놓고 한 서너 번 숟가락이 오가면 벌써 동 나버린다. 입은 꿀맛이고 밥은 너무도 적다. 정 아쉬우면 밥 없는 반찬을 두어 젓가락 더 먹어본다.

지금은 다이어트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밥 한 수저 덜 먹고 숟가락을 놓는 사람이 결단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올해로 4년째 대풍이라는 반가운 소식인데, 너도나도 밥 알기를 무슨 원수 보듯 하니 저 들녘의 황금물결을 어찌한단 말인가.

내가 어릴 때는 쌀이 참 대접받았다. 농사철에 들 밥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고봉밥의 추억이 있으리라. 모내기 철 무논에서 장시간의 중노동에도 쌀밥 한 주발이면 스르르 피로가 풀리던 기억. 보리쌀 하나 안 섞인 눈부시게 하얀 쌀밥은 큰 반찬 없어도 융숭한 대접이었다.

그때 내 고향에는 도로에 군용 트럭이 자주 오갔는데, 한 번은 고장 난 트럭을 수리하느라 미군이 애쓰고 있었다. 도로 옆 논에서는 일꾼들이 모내기를 했다. 마침 아낙네가 들 밥을 무겁게 이고 오자 가로수 그늘로 일꾼들이 모였다. 미군은 앞앞이 고봉밥을 놓고 수저를 든 사람들이 걱정되어 눈을 떼지 못했다. 주발에 담긴 밥보다 주발 위로 올라온 밥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 밥을 다 먹은 사람들이 쉬려고 길 가 그늘에 하나 둘 누웠다. 미군이 놀라 소리쳤다. 한국 사람들 밥 너무 많이 먹어 기절했다고, 응급조치해야 한다며 다급하게 솰라댔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때처럼 밥을 많이 먹지 않는다. 빵, 고기, 과일 등의 먹을거리가 넉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입쌀이 넘치고 보니 풍년도 반갑지 않다. 그러나 모두가 간식을 줄이고 밥을 조금 더 먹는다면 우리 쌀이 어쩌면 대접을 좀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나도 참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농사철도 아닌데 간식은 안 먹어도 그만이지 않은가. 간식만 끊으면 그 먹고 싶은 밥을 좀 넉넉히 먹어도 뱃살이 좀 빠질 텐데, 잘하면 우리 쌀은 살찌우는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도 있을 텐데.

내일 아침에는 가지도 좀 더 넉넉히 찌고 가을 호박도 좀 더 푸짐하게 볶아야겠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에 청양고추와 파를 송송 썰어 넣고 불을 끄면 알싸한 고추 향이 살아있는 찌개 맛이라니. 그렇게 차린 밥상에서 윤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을 아주 맛나게 조금은 넉넉히 먹는 것이다. 마음만으로도 벌써 군침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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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영 2016-10-11 12:46:25
쌀밥에 대한 님의 글이 얼마나 맛갈스럽던지 답글이 저절로 써집니다.
저도 충청도 시골마을에 태어나서 쌀밥에 대한 그리움으로 글을 씁니다.
부디 쌀밥 많이 잡숫고 일 많이 하셔요~ 그러면 면 살 안찝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