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 손순효 이야기
애주가 손순효 이야기
  • 박상일 <청주문화원·수석부원장>
  • 승인 2016.10.0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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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박상일 <청주문화원·수석부원장>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가을이 제일이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 들녘과 길가의 코스모스는 보는 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그런데 요즘 청탁금지법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인해 모두 움츠리고 왕성해진 가을 식욕을 억누르고 있는 모양새다. 수확의 계절이니 먹을거리도 많고 겨울을 대비하여 체력도 비축해야 할 때인데 말이다. 그래도 맑고 투명한 사회를 위해서는 필요한 법이고 어느 정도 과도기를 지나면 당연한 사회문화로 정착되지 않을까 한다. 오늘은 좀 가벼운 주제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애주가였던 손순효(孫舜孝) 선생을 소개한다.

손순효의 본관은 평해(平海), 호는 물재(勿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453년(단종 1) 증광문과에, 1457년(세조 3)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성종 때 주로 활약하면서 여러 벼슬을 거쳐 마지막에 중추부 판사를 지냈는데, 1496년(연산군 2)에 70세 고령을 이유로 사퇴를 청했으나 불허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그는 성리학에 밝고 중용 대학 역경에 정통했고, 「세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그림은 화죽(畵竹)에 능했으며 무엇보다 청백리이면서 애주가로 유명하다.

손순효는 평소 술을 좋아해 조정에도 얼굴이 벌건 모습으로 나타나곤 해 그를 총애했던 성종은 석 잔 넘게 마시지 말라는 계주령(戒酒令)을 내리기까지 했다. 하루는 성종이 손순효를 불러 중국에 보내는 국서를 지으라 했는데 그를 보니 이미 몹시 술에 취해 있었다. 성종은 ‘내가 딱 석 잔만 마시라 했거늘 이를 어기고 어찌 이리 대취했는가?’불호령을 내리고 다른 신하를 불러오라 했다. 손순효는 황공해서 부복한 채로 ‘오늘 신의 출가한 딸이 들러서 뭇사람의 권함을 이기지 못하고 주는 대로 마셨지만 글을 짓는 데는 과히 지장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부르실 것 없이 신에게 하명하소서’ 했다. 취중에 과연 어떻게 하나 보려고 붓과 벼루를 내주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는데 과히 명문장이었다. 성종은 다소 괘씸했지만 크게 칭찬하며 ‘너는 취한 정신이 한층 맑구나’하고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해롭다 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면서 은잔 한개를 하사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입시한 손순효의 얼굴을 보니 예전처럼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아무리 총애하는 신하지만 성종은 화가 나서 ‘내가 술을 경계하라고 일부러 작은 술잔을 주었거늘 어찌 이렇듯 많이 취했는고. 한 잔만 마시지 않고 여러 잔을 마셨구나’ 꾸짖었다. 손순효는 국궁하고 ‘신이 어찌 어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신은 딱 한 잔만 마셨을 뿐입니다’고 대답했다. 서슴없는 대답에 성종도 그가 왕을 속일 리는 없다 생각하고 은잔을 가져오게 해 살펴보니 왕 앞에 대령한 술잔은 주발만 한 것이었다. 성종은 크게 의아하여 자초지종을 물으니 손순효는 부복해 말하기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상감마마께옵서 주신 술잔이 너무 작기에 은장(銀匠)을 시켜 잔을 늘리기만 했을 뿐 은의 무게는 조금도 보태지 않았사옵니다’했다. 그러자 호방한 성종은 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걷잡을 수 없어 크게 웃고는 ‘앞으로 내 속이 협착한 데가 있으면 그처럼 두드려 넓게 해다오’라며 다시는 술과 관련한 일로 손순효를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늘 안주가 부족한 손순효의 집에 가끔 음식을 내려 보냈다고 한다.

손순효의 묘소는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뒷산에 있는데 묘의 둘레석에 술병과 술잔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애주가이면서 청백리였던 조상님에 대한 애틋한 존경의 마음을 표현한 후손들의 감각과 기지가 웃음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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