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표충사에 모신 3분의 충신들
청주 표충사에 모신 3분의 충신들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10.0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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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청주 수암골 카페 언덕에서 시내 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골목 끝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골기와집 서너 채가 있다. 이 건물이 영조 때 일어난 ‘이인좌의 난’을 막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충신 3분을 모신 사당 표충사(表忠祠)이다. 이때 순절한 분은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이다. 1731년에 세워진 이 사당은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충청북도기념물 제17호이다.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였던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대손으로 1702년 무과에 급제하고 포도대장과 삼도수군통제사, 한성부우윤 등 주요 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1725년(영조 1년) 당시 어려운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좌천되어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오게 된 것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함락하였을 때 숙부인 이홍무와 함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싸우다가 결국 반란군에게 붙잡혀 죽게 되었다.

충청도 병영의 군사 책임자였던 남연년은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727년(영조 3) 청주영장 겸 토포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역도들이 상여에 병기를 넣고 청주성으로 들어왔다. 이를 수상히 여긴 그는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에게 상여가 성내로 많이 들어오니 조사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날 밤 역도들이 감영 안으로 쳐들어오자 이봉상은 대나무 숲으로 도망갔으나, 그는 누대 위에 당당하게 앉아 역도들에게 오히려 야단을 치며 훈계를 하였다. 역도들이 이봉상의 거처를 묻자, 자신이 바로 이봉상이라고 말하여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남연년은 절충장군 금군장을 경상우병사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에 이어 2대가 나라에 충성하는 집안이 되었다.

아울러 표충사 내에는 홍림의 연인이었던 해월의 ‘열녀각’이 있어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월은 홍림이 죽은 후 그 시체를 찾아 장례를 지내고 뒤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임신 중이어서 차마 죽지 못하고, 홍림의 아이를 낳아 기르다 전염병이 돌아 아이를 잃게 되자, 자결을 함으로써 홍림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그들이 죽은 뒤 그 충절을 높이 여겨 이봉상에게는 충민공, 남연년에게는 충장공이란 시호를 내리고 홍림에게는 호조 참판을 수여하였다. 1731년 청주읍성 북문 안에 표충사를 세웠다가, 1939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지었는데, 3분을 모셨다고 해서 삼충사라고도 부른다.

충신들의 마음처럼 와우산의 단풍이 유난히 붉은 아름다운 이 가을에 우리 고장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신 3분의 충신들을 만나러 표충사에 가보자. 그곳에서 나는 어떻게 사회와 인류를 위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이웃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될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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