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지도
나무 지도
  • 전현주<수필가>
  • 승인 2016.10.0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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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전현주

얼마 전 휴일에는 20년 전 광주에서 셋방살이하던 집을 들러보고 둘이 갔던 목포의 유달산에 아이들과 함께 올라가 노을을 바라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광주로 향하면서 셋집을 잘 찾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자 “설마 우리가 3년이나 살았던 집도 못 찾겠느냐?”며 남편이 큰소리를 친다. 하기는 나도 지금까지 그곳을 잊은 적이 없다.

타향에서의 신혼생활은 낯설고 적막했다. 겨울이면 이집저집 담장 너머로 보이던 새빨간 동백꽃과 한낮이 되면 순식간에 녹아 자취를 감추던 폭설. 걸쭉한 사투리. 가는 곳마다 나를 괴롭히던 삭힌 홍어 냄새. 그리고 지독한 입덧을 단번에 잠재워준 주인집 아주머니의 맛깔스런 남도 김치와 정겨운 이웃들. 나는 그곳에 있던 모든 것을 가슴속에 새겨두었다. 언젠가는 꼭 한번 다시 찾아가 인사를 하리라 마음을 먹고 꾸준히 기억을 관리해왔다.

설마 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우리는 집을 찾지 못하고 같은 곳을 몇 바퀴째 빙빙 돌고 있다. 방향조차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대학교 근처에 있는 마을은 신축된 하숙집과 원룸으로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큰아이와 산책하러 다니던 초등학교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문 앞에 있던 분식집은 문구점으로 바뀌었다. 상가 모퉁이를 돌아가 보니 작은 놀이터가 있던 자리에 처음 보는 건물이 있다. 우리는 또 길을 잃었다. 다음 일정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정말 포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때 맞은편 골목에서 서너 명의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길이 움직여졌다. 건물 사이로 몇 그루의 나무가 언뜻 보였다. 메타세쿼이아다. 산책길에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나무가 아직도 그 자리에 줄지어 서 있었다. 메타세쿼이아 그늘을 벗어나면 무화과나무가 있는 집이 나온다. 몇 걸음 더 가다가 방향을 꺾으면 짧은 내리막길이 나오고 잘생긴 목 백일홍이 나타날 것이다. 과연 그곳에 진분홍색 꽃을 환하게 피운 배롱나무가 지금껏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이제 곧 우리가 살던 집 마당의 감나무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많이 늙으셨을까. 살피꽃밭의 분꽃과 과꽃도 그대로 일까.

어릴 때부터 나무나 꽃으로 장소를 기억하는 버릇이 있었다. 비과학적이라는 소리도 종종 들었지만 때로는 내 기억이 더 정확하여 주소를 들고 찾아가는 사람보다 오히려 쉽게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한다. 봄이면 보라색 으아리가 탐스럽게 피는 집이라든지, 인동 울타리나 화살나무가 붉게 물들어 있던 자리 등으로 가는 길을 기억하는데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나무와 꽃들이 훗날 아름다운 이정표가 되어 준다.

우리가 셋집을 찾아갔을 때 겨우 몇 채의 집만이 새 건물들 틈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 더 늦었더라면 주인집 아주머니를 뵙지도 못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을 것이다. 그리운 사람은 미루지 말고 만나야 한다. 사람들이 곳곳에 켜놓은 나무 등대의 불빛이 희미해지기 전에, 꽃 초롱의 불씨가 꺼지기 전엡. 나는 지금 노랗게 잔물지는 이팝나무 길을 지나, 다리를 건너, 좀 작살나무 열매가 아름답게 익어가는 집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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