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
  • 이지수<청주중앙초 사서교사>
  • 승인 2016.10.03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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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말하는 행복한 책읽기
▲ 이지수

며칠 전 아버지와 연세도, 직업도 똑같은 백남기 씨가 세상을 떠났다. 남의 일이라 여기고 거리를 두면 편할 것을, 난 또 그러지 못하고 생판 남인 그분의 죽음을 부여잡고 있다. 남은 삶의 얼마를 가족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으셨을지, 얼마를 논과 밭을 예술작품으로 가꾸며 살아갈 수 있었나를 이제 더는 기약할 수 없어졌기에 싸하니 가슴이 미어온다.

문득 민주화란 무엇인가? 반문해본다. 일흔을 눈앞에 둔 평범한 농민이 거리에 나서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공권력을 앞세운 국가는 힘없는 노인이던 그에게 왜 살수 직사를 쏠 수밖에 없었는지 물어본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사라져버린 이 현실에서의 이.유.를 아무도 답해줄 수 없지만 자꾸 물어본다. 한 가지 더 묻는다. 그렇다면 백남기 씨는 공권력에 의해 쓰러진 그냥 피해자인가? 이 물음에는 나 스스로 답해 보이겠다. 그는 절대 그냥 피해자가 아니다. 단순히 피해자라고 불리는 순간, 그의 죽음이 담고 있는 의미가 너무 평면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슬퍼진다. 아니다. 그분은 스스로 소신을 지키고, 진짜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희생된 용기 있는 분이다. 故 백남기 씨의 명복을 빌며, 오늘은 그를 위한 소설로 이 칼럼을 쓰고자 한다.

소설 ‘소년이 온다(한강·창비)’는 숫자로 아로새겨진 그날의 기록을 담고 있다. 바로 5.18 광주민주화항쟁이다. 항쟁과 사태의 차이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선 부르르 몸을 떨었던 그날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소설에는 모두가 주인공이며, 작가가 소설 속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시점은 ‘너, 당신, 그(녀)’의 2인칭, 3인칭이다. 최대한 실존했던 이들 중심에 서려 했던 작가의 장치인 것 같아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내내 힘들었다.

2009년 여름, 1정 사서교사 연수 장소였던 전남대 교정도 다시금 떠올려 본다. 평화로워 보이던 너른 잔디밭에 ‘타도 학살정권’ 현수막을 갖고 누워 있던 여학생의 시신이 아직도 그곳에 영혼이 되어 머물고 있는 듯하다. 당시 군인출신이었던 대통령은 자신이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는데, 그럼 군인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그토록 잔인하게 무자비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인가? 정녕 명령 없이 군인 스스로 그럴 수 있었을까?

기억은 이미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가 자욱이 흘렀을 그 거리, 금남로도 기억으로 되새겨보고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담겼던 그날의 기억을 오롯이 담은 사진전시도 떠올려본다. 분명 그 거리의 그날 그들은 故 백남기 씨처럼 아닌 것에는 분명히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맨손으로도 맞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닌 분들이셨다. 아직도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그 거리에서 살아남았다는 미안함에서, 고문의 기억에서 지금도 힘겹게 하루를 살아가는 그 거리에 섰던 분들께 손을 마주 잡아드리고 싶다.

E.H. 카는 저서 ‘역사란 무엇인갗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다. 나도 한때는 읽으면 힘겨워지는 내용을 담은 책을 기피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읽고, 찾아가서 그 현장을 보고 기억하고 또 생각하려 한다. 나 스스로 변해야 아이들이,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잊지 않고 미래에는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기에 그렇게 사서교사로서의 내 본분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부디 우리의 표로 우리를 대표하는 중책을 맡게 된 이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고개 숙여 귀 기울이는 눈높이 정치를 하기를, 반드시 정책을 행하는데 있어 그 대상이 자국민 중심적인 사고에서 출발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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