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을 걷다
옛길을 걷다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6.09.2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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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용례

가을을 부르는 비가 내린다. 비를 따라 상당산성 옛길을 걷는다. 내가 어렸을 때 이곳 명암약수터로 소풍을 왔다. 지금은 약수터가 있는지조차 관심이 없다. 몇십 년 차로만 다니던 길, 터널이 뚫리면서 상당산성 옛길은 차량통행을 금지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길로 잘 가꿔 놓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길이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이 길에서 위로를 받았다. 휙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만 보았을 뿐 그래도 가슴이 트였다. 이 길에서 나뿐만 아니라 청주에 사는 많은 사람의 가슴을 달래 주었으리라. 오늘은 약수터에서 산성까지 숲의 향기를 맡으며 걷는다.

옛길은 처음부터 오르막이다. 다 오를 때까지 평지도 내리막도 없다. 완만하다가 가파른 길과 만난다. 가파른 길을 오른 후 쉼터가 있다. 쉼터마다 산성에 있는 바위와 밤고개, 과상미 등 동네 설화를 써놓았다. 설화를 읽으며 천천히 오르니 무당거미가 집을 짓고 있다. 거미가 먹이 사냥을 하는 진귀한 장면도 볼 수 있었다. 걷지 않으면 도저히 볼 수 없는 특별함이다.

지금은 길 한옆으로 고마리와 물봉선화가 한창이다. 이런 꽃들과 곤충들과 해찰을 떨며 한참을 오르다 보면 습지가 있다. 쥐꼬리 샘터에 가재가 살고 있는 것도 보았다. 오르는 일은 쉽지 않다. 숨이 턱까지 찰 때 벤치가 보인다. 커피를 마시며 가재와 잠시 노는 것도 힐링이 된다.

계절은 여름과 가을의 교차점에 있다. 숲 속의 나무들은 갱년기를 넘긴 여자처럼 윤기를 잃었다. 윤기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푸르다. 아직은 여자라고 화장을 하고 나서는 내 모습이 저러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계절을 이겨낸 숲의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이렇게 푸석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 거야. 머지않아 고운 단풍으로 거듭날 거야.’라고 하는 것 같다. 머지 않아 나무들은 황홀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생각만 하고 있으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가을이라고 꿈을 꿀 수 없는 계절은 아니다. 산성 옛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산성 옛길은 아무리 마음이 앞서도 빨리 갈 수 없다. 이 길을 넘어 본 사람은 안다. 어떤 고개 든 한 번쯤 다 넘어 보았으리라. 단숨에 오르려 하면 꼭 탈이 생긴다. 천천히 올라보라. 두 발로 걸어서 오르내리며 주변을 보는 즐거움이 크다는 것을 알 것이다. 혼자서도 좋다. 그러나 누구라도 함께 갈 수 있다면 함께 하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내가 오른 길도 함께여서 끝까지 오를 수 있었다.

상당산성을 한 바퀴 돌아 걸어온 길로 내려왔다. 내려가는 걸음은 쉬울 것 같았는데 내려오는 길도 쉽지 않다. 쉽다고 한눈팔다가 다리가 휘청거려 넘어질 뻔 했다. 오를 때보다 힘은 덜 들지만 조심스럽다. 옛길은 인생의 후반에 있는 사람들의 여유 같다. 아이를 데리고 젊은 부부가 올라간다. 부모 손에 끌려온 아이는 힘들고 재미없다며 내려가자고 떼를 쓴다. 아이와 옥신각신하는 그 모습을 우리는 한참 바라보았다.

올라올 때는 비가 제법 내려 우산을 쓰고 왔다. 내려오니 비가 멈췄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구월이 속절없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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