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들여다보다
나를 들여다보다
  • 이창옥<수필가>
  • 승인 2016.09.27 18: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얼굴에 비벼대는 바람도 가슬가슬하고 청량한 하늘을 자꾸만 올려다보게 되는 날들이다. 가을바람을 즐기고 하늘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고 느끼는 만큼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 절친한 지인의 불행한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거렸다. 이제 열일곱 살인 그 집 아들이 사고를 당해 생사를 넘나든다는 것이다.

그날 낮에 아이 엄마와 점심을 함께하며 즐거워하던 시간이 꿈인가 싶었다. 그녀는 중환자 병실 앞에서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아이를 위해서 “기도 좀 해주세요” 하던 그녀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 부탁이 아니더라도 사고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을 소환해 아이가 견뎌내고 살아주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불과 보름 사이 아이는 세 번의 수술을 잘 버텨내고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한 번도 견뎌내기 힘들었을 터인데 고맙고 대견하다. 그리고 중환자병실 앞 의자에서 쪽잠을 자며 아이를 지키는 아이 엄마를 생각하면 내가 누리는 이 소소한 일상들이 다행스러워 안도의 숨을 내 쉰다.

순간 멈칫했다.

소름이 돋는다. 나도 별수 없는 인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고통을 함께하며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아파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불행이 비켜간 무탈한 나의 일상이 다행스럽고 행복하다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내 안에도 지독한 양면성이 존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녀와 아이를 위해 걱정하고 기도하는 마음은 거짓 없는 진심이다. 무탈한 일상에 안도하고 행복해하는 마음 또한 진심이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부끄러움은 내가 지닌 양면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만은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닌 척 선(善)만을 가장하며 살아온 탓에 겪는 일이 분명할 터였다.

소소하고 무덤덤하다 생각한 날들이 진작 귀한 행복임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행한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못난 자아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일은 참담하다.

그럼에도 내 안의 지독한 양면성을 마주 보려 한다. 잘난 곳 하나 없고, 선한 구석도 없는 나를 수긍하는 것도 힘들지만 잘난 척, 선한 척 가면을 쓰며 살아가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하기는 더 고통스럽다.

인간 모두에게 있다는 양면성은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같은 것은 아닐까.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을 직시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배려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의 휴대폰 상태메시지가 바뀌었다. 사고 이후로 아이의 상황에 따라 간절한 마음을 표현했었다. 처음에는 오롯이 아이만을 위해 기도하던 그녀가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고 자가 호흡을 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나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앞으로도 나는 내 안의 양면성을 들여다보며 갈등 속에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을 위한 꼭 필요한 일이기에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보리라. 또 다른 내 모습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