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의 향연
가을밤의 향연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9.2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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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밤은 사색과 청각의 시간이다. 특히 가을 밤이 그러하다. 시각적으로 번다하고, 활동을 많이 하는 낮과는 달리 밤은 시각적으로 제한적이고, 활동 또한 현저히 줄어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면의식이 발현되어 사색에 빠지게 되고 청각적으로 예민하게 된다. 이러한 밤의 속성이 제일 강하게 드러나는 때는 가을밤, 그중에서도 달이 뜬 가을밤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이덕무(李德懋)는 달 뜬 가을밤에 과연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었을까?

가을밤에 읊다(秋夜吟)

一夜新凉生(일야신량생) : 밤이 되니 찬 기운 막 돌기 시작하고
寒蛩入戶鳴(한공입호명) : 귀뚜라미 문에 들어 우네
野泉穿竹響(야천천죽향) : 들의 샘물은 대숲 뚫고 소리 내어 흐르고
村火隔林明(촌화격림명) : 마을 등불이 숲 건너서 밝게 빛나네
山月三更吐(산월삼경토) : 산은 한밤에 달을 토하고
江風十里淸(강풍십리청) : 강바람은 십리 밖에서도 맑게 느껴지네
夜爛星斗燦(야란성두찬) : 밤이 깊어 별빛 찬란한데
玉宇雁群橫(옥우안군횡) : 창공에 기러기 떼 비끼어 날아가네


시인이 가을 달밤에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찬바람이다. 한낮에는 더위가 아직 남아있지만, 밤이 되면 선선해지는 것이 가을 날씨이다. 이러한 가을 날씨를 어찌 아는지, 용케도 나타나 집 안으로 들어온 귀뚜라미가 시인의 두 번째 가을 손님이다.

귀뚜라미가 꼭 가을밤에만 우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을밤에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가을밤의 고요함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시인은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자 집 밖으로 나섰다. 들판에 나서서 만난 것은 샘물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눈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귀로 만났다는 것이다. 밤인지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귀로는 낮보다 훨씬 선명하게 들렸다. 대나무 숲을 뚫고 무언가 흐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는데 시인은 이 소리를 듣고 그것이 샘물이 흐르는 소리임을 바로 알아챘던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멀리 내다보니, 건너편 마을의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호롱불 빛이 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가을밤의 따뜻한 정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산이 토해낸 밝은 달, 십리 밖에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바람, 밤이 깊을수록 찬란하게 빛나는 별, 가을밤 하늘을 수놓으며 나는 기러기 떼 같은 가을밤의 진객들이 차례로 시인의 감각을 자극하고 나섰으니, 밤 그것도 가을 달 밤 시인은 한껏 사색에 빠지고 귀로 눈으로 가을밤의 향연을 즐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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