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이 살려면
‘김영란법’이 살려면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6.09.2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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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A씨는 지난 2013년 중소기업진흥공단(이하 중진공) 입사시험에 원서를 냈다. 36명을 뽑는데 4500여명이 지원해 경쟁률이 125대 1에 달했다. A씨는 170명을 걸러내는 1차 서류심사에서 2299등을 했다. 두말할 나위없는 탈락이었다. 이때부터 중진공의 처절한 A씨 구하기가 시작됐다. 심사 결과를 재 조정해 1200등까지 끌어올렸다. 그래도 170명에 들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석차였다. 이번에는 제출서류의 어학 성적 등을 조작해 순위를 높였다. 온갖 변칙에 불법까지 동원했지만 A씨의 석차는 176등까지가 한계였다. 중진공은 집요했다. 1차 합격자를 170명에서 176명으로 늘려 기어이 A씨를 구제했다.

그러나 A씨는 중진공의 눈물겨운 노고에 보답하지 못했다. 최종 인·적성 심사에서 176명 중 바닥권인 164등에 그쳤다. 이제 중진공은 막무가내로 나왔다. 자격미달도 한참 미달인 그를 합격자 36명 명단에 우겨넣었다. 보다못한 외부 심사위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문제가 밖으로 불거질 조짐을 보이자 중진공은 마지못해 그를 불합격 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사장이 국회를 다녀온 바로 다음날 중진공은 불합격 결정을 내렸던 A씨를 합격자로 돌변시켰다. A씨는 정권 최고 실세로 꼽히는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 사무실의 인턴 출신이었다. 최 의원의 외압 의혹이 제기된 것은 당연했다. “이사장이 국회를 찾아가 불가피한 사정을 전하고 이해를 구하고자 했지만 실패한 것 같더라”는 직원의 진술과 시험 담당 직원에게 입조심을 당부하는 중진공 간부의 녹취록도 공개됐다. 감사원은 지난해 조사를 벌여 최 의원과 관련 직원들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그러나 연초에 최 의원은 무혐의 처리되고 이사장 등 중진공 직원들만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됐다.

모레부터 ‘김영란법’이 시행된다. 이 법의 취지는 이해 당사자들이 3만원 넘는 밥이나 5만원 넘는 선물을 주고받지 말자는 선에 그치지 않는다. 법의 본명인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말해주듯 사소한 일탈이 사회를 좀먹을 부정이나 비리로 자라나지 않도록 싹부터 자르자는 것이 입법 취지의 핵심이다. 공공기관을 비롯해 학교, 언론사 등 이 법의 적용 대상만 4만919개 기관이다. 사생활 침해가 우려되는데다 이해충돌 방지 조항과 국회의원이 대상에서 빠져버려 반쪽짜리 법이 됐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수백만명에 달하는 대상자들이 입법을 저항없이 수용한 것은 깨끗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는 거부할 수 없는 명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중진공 입사시험 비리의 전말을 보면 김영란법이 어쩌다 밥 한끼 잘 못먹은 아랫사람들만 때려잡는 비겁한 룰이 되지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최경환 의원은 서면조사만 받았고 검찰은 청탁을 받은 적 없다는 당시 중진공 이사장의 진술을 근거로 무혐의를 결정했다. 그러나 최근 전 이사장은 법정에서 최 의원의 청탁이 있었다고 말을 바꿨다. 낯두꺼운 권력과 영혼없는 하수인, 휘슬을 울리지못하는 수동식 시스템이 합작해낸 우울한 막장극 중 한 편이 됐다.

‘급매매, 매매가 1173억원’으로 광고가 나간 땅이 153억원이나 비싼 1326억원에 팔렸다. 판 쪽은 청와대 수석의 처가이고 산 쪽은 현재 비리에 연루돼 수사를 받는 기업이다.

제기된 의혹은 근거없는 정치공세, 의로운 길을 걷는 사람에 대한 모함 등으로 치부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검찰의 조사 대상이 됐다. 스폰서로부터 장기간 수억원대 향응과 금품을 받았다는 부장검사는 대검에 보고된지 4개월이 다 돼서야 감찰을 받기 시작했다. 고위층과 권력층의 비리가 앞으로도 이런 몰염치한 방식으로 처리된다면 김영란법은 취지도 권위도 인정받기 어렵게 된다. 부패 방지를 위해 밥값까지 규제하는 법은 선진국에서 전례가 없다. 이 부끄러운 법을 초래한 당사자들의 대오각성이 김영란법을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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