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곡과 괴산의 구곡
한국의 구곡과 괴산의 구곡
  • 김홍숙 괴산군문화해설가
  • 승인 2016.09.2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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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대한민국에서 구곡이 가장 많이 설정된 곳은 충북이라고 한다.

충북은 남한의 중심부에 있다. 구곡과 구곡시는 문화의 세기에 충북은 물론 한국이 주목해야 할 우수한 문화자산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구곡과 그 주변 문화유적과 연계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은 충북의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몫이 크다고 생각한다.

최초로 구곡을 설정한 사람은 중국의 주자라고 한다. 주자는 무이산의 무이구곡을 설정하였으며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구곡은 아홉 개의 곡(曲)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것은 주역 구오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라 한다.

구오는 만물이 각각 그 기능과 역할을 다하여 원만하고 활발하게 작용하여 천하를 으뜸으로 잘 다스려지게 하는 상황을 표현한 괘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구곡을 설정한 것은 순리대로 원만하게 천하가 으뜸으로 잘 다스려지기를 기원하는 천하관과 정치관의 자연에의 표현이다.

구곡 ‘아홉 개’의 곡을 설정하게 된 것은 [주역]의 구오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한 인물로는 홍양호(1724~1802)라고 한다. 홍양호는 정조 때 판서를 지냈으며 저명한 학자로 [해동명장전]의 저자이며 벽초 홍명희의 선조이다. 홍양호는 서울 우이동에 우이구곡을 설정하였는데 만경폭, 적취병, 찬운봉, 세묵지, 옥경대, 월영담, 탁영암 등이며 국립공원 북한산 우이분소에 산재해 있다.

충청북도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구곡으로 우암 송시열이 설정한 화양구곡이 있으며 서계 이득윤은 옥화구곡을 설정하고, 유근은 제월리에 고산구곡을, 노성도는 연하구곡을, 전덕호는 갈은구곡을, 이영은 선유팔경을, 신득치는 낙우당구곡을 설정했다. 이 모든 것은 구곡의 조선적 표현의 사례들이다. 조선말 일제 강점기에 충북을 비롯하여 기호지방은 물론 전국적으로 상당수의 구곡이 설정되었다.

특히 기호 사림들은 일제 강점기에 존주대의 존화양이 사상을 견지하고 왜세를 척결할 대안을 모색하는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구곡을 설정하고 화양구곡을 순례하였다 한다. 이렇듯이 구곡이 사림들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다.

구곡의 설정과 관련하여 팔경의 설정에 관해서도 알아보자. 산수가 좋은 곳에는 구곡이나 팔경이 설정된 경우가 많다.

팔경과 구곡을 설정하는 일정한 원칙은 없다고 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구곡이나 팔경을 설정하기도 한다. 동일인이 일정 지역에 구곡을 설정하기도 하고 또 다른 지역에 팔경을 설정하기도 한다. 대체로 설정된 곳의 특징을 살펴보면 맑은 공기와 맑은 물이 필수이며 깨끗한 모래와 여러 형태를 하고 있는 바위, 거기에 용트림을 하는 소나무와 잘 어우러진 암벽을 볼 수 있다.

처음에 팔경이 설정되었다가 후대에 구곡으로 분화, 변천되는 경우도 있다. 산수가 좋은 곳을 서로 애호하고 즐기려니 남이 설정한 것과 중복되더라도 개의치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통계상으로는 구곡과 구곡시 보다는 팔경과 팔경시가 더 많은 실정이라고 한다. ‘구곡문화 관광특구’ 인근이나 그 권역 내에도 팔경이 상당수 존재한다.

괴산의 고산구곡 하류 쪽에 김득신의 취묵당팔경과 상류 쪽에는 박지겸의 애한정팔경이 있다. 이렇게 선인들은 팔경과 구곡을 통해서 자연산수를 대하는 자연관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팔경과 구곡은 인간 본연의 의식 속에 내재하는 자연 회귀의식의 발로이며 자연친화의 표출이다.

또한 그들은 자연과의 조화 합일을 추구했으며 자연을 보호하면서 거기서 인생을 관조하기도 하고 심성수양의 도량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때로는 시문의 소재로 삼기도 했으며 팔경과 팔경시는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와 합일을 추구했던 의식의 산물로 볼 수 있고 구곡과 구곡시는 도학사상의 자연적 표현이자 신선사상의 자연적 표출로 볼 수 있다.

차기에는 구곡과 구곡시 팔경과 팔경시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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