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부의 `시간'들
놀부의 `시간'들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6.09.2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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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초가집 위로 넉넉한 보름달을 닮은 박이 달렸고, 사립문 안마당에는 멍석 위로 붉은 고추들이 자신의 살들을 바짝 말리고 있을 가을이다.

흥부네 집 풍경이 이러했을까. 그들은 단칸방 안에서 서로 살을 비비며 양보와 배려와 포기할 줄 아는 미덕을 배웠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의 삶들이 지난할지라도 마음만은 넉넉한 흥부의 계절이 돌아왔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마을에는 흥부의 후손들이 지천으로 살았다. 우리 집도 그중에 하나였다.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어쩌다 아버지가 이웃집에서 얻어 온 떡이라도 있는 날에는 서로 먹으려 다툼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지청구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그나마 살림이 조금 나은 집 어른이 생신을 맞으면 이웃들을 불러 따듯한 밥 한 끼라도 같이 나누어 먹곤 했다. 특히 명절에는 동네 아이들이 집집을 돌아다니며 인사도 하곤 했는데 그러면 그 집의 안주인은 답례로 먹을거리를 내어 주었다. 지금은 예전의 정을 볼 수가 없다. 외지의 자식들은 차례를 지내기가 무섭게 고향을 떠나간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놀부 자식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몸이 아픈 늙은 엄마에겐 아들과 딸이 있지만 독립할 나이가 되자 외지로 둥지를 옮긴 뒤 왕래를 끊어 버렸다는 이야기, 업둥이를 데려와 애지중지 키웠지만 그 자식은 커서 부모의 재산을 대출과 사채로 모두 탕진하고 다시 자신의 뻐꾸기 둥지로 날아 가버렸다는 늙은 뱁새 부부의 슬픈 이야기, 기초생활보장 수급을 받았던 늙은 부부는 찾아오지도 않는 5남매를 두었다는 죄로 수급자 자격이 박탈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내는 폐암 판정을 받았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

믿음직하던 큰아들은 부모의 땅을 야금야금 처분해 가더니만 시나브로 부모를 잊어버려, 세상의 기둥을 잃은 늙은 남편은 목숨을 끊고 아내는 홀로 남아 쓸쓸히 명절을 맞는다는 기막힌 이야기.

하지만 외롭고 쓸쓸한 늙은 그들은 놀부가 아니었다. 세상의 ‘시간’들이 자식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모두가 더 높이 올라가 최고가 되어야 하고, 빠른 속도의 세상을 따라잡아야 하고, 내 것을 찾아야 하고…그렇게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에도 없는 놀부의 자식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그래야만 내가 살아남는 것이라고 세상의 ‘시간’은 놀부의 ‘시간’으로 순한 흥부의 자식들을 유혹해서는 잡아먹고 있다.

한가위의 달빛이 거리의 화려한 네온사인의 불빛에 그만 질식해 버리고 만다. 놀부의 자식이 되어버린 아이는 지금 도시의 불빛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른 둥근 달을 보며 먼 옛 추억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한가위의 밤, 소원을 빌기 위해 한손엔 지등을 밝히고 한 손엔 어린 자식의 손을 꼭 잡은 채 동산을 올랐던 아버지와의 그 순간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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