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
  • 정현수<칼럼니스트>
  • 승인 2016.09.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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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정현수<칼럼니스트>

처가에 처음 인사를 갔다. 변변한 직장도 없이 공부만 하는 백면서생을 장인어른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자격지심으로 좌불안석인 내게 처형들이 음식을 내왔다. 처음 온 사윗감을 위해 준비한 음식치고는 매우 특이했다. 개고기 수육을 내왔던 것이다. 처가 식구들은 자주 먹는지 모든 과정이 익숙해 보였다. 그때까지 개고기를 먹어본 적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터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망설임은 너무나 허망하게 증발하고 말았다. 장인어른 앞에서 남자답고 복스럽게 먹어보임으로써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개고기를 먹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엄청난 충격에 빠질 것 같았는데 의외로 덤덤했다. 시골집 마당에서 기르던 개들의 맑은 눈망울이 떠올라 미안해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맛이었구나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내 변절은 사소하고 간편했다.

그날 이후 개고기를 일부러 찾지는 않지만 먹을 기회가 생기면 거부하지는 않는다.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가 먹는 사람이 되었으니 어느 쪽을 편들거나 혹은 비난하더라도 충분한 자격이 되지만 그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는 않았다.

올림픽 열기가 한창인 지난달에 유명 슈퍼모델의 엄마라는 정모씨가 SNS에서 기보배 선수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국가대표 양궁 선수가 개고기를 먹는 것은 나라 망신을 국가대표급으로 시키는 거라는 황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정씨는 집 안에 여러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는 애견 사업가로 알려졌다. 또 자신의 애완견에게 소고기를 구워 먹이면서 그 사진을 블로그에 공개해 누리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그녀의 블로그는 애완견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들이 끊임없이 대립했으므로 정씨의 욕설은 애견인들의 응원을 기대한 의도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듯 홀로 용감할 수가 없다. 애견에 대한 정씨의 주장과 태도는 너무 우악스러워 설득력이 떨어진다. 목소리가 난폭할수록 그녀의 생각도 오히려 가벼워 보인다.

개를 먹지 않겠다던 내 생각이 장인어른의 근심 어린 눈빛 앞에서 허망하게 증발되었듯 애견에 대한 그녀의 고집 또한 특정 상황에서는 그러하리라. 도란도란 둘러앉은 식탁에서 나 혼자만 배제되는 소외감은 그녀도 감당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인간의 신념이 참으로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 그 무력감으로 어떤 것도 인정하고 시도할 수 없을 때는 정씨와 같은 단순함과 무모함이 부럽다.

떨어져 있으면 한시도 못살 것 같던 사랑도 시간에 풍화되면서 서먹해지는 마당에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의 경계가 무에 그리 대수인가. 젊어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시인이 나이 들어 반대편을 옹호하고 나섰을 때 그 변절을 비판하던 대중들도 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개고기를 먹었던 것처럼 그 시인의 신념도 시대의 상황과 눈빛을 못 이겨 증발해버렸을 것이다.

견고하지 않은 찰나의 심리상태를 신념이라 믿고 우기며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자들의 엉뚱함으로 세상은 날마다 요란하다.

끊었노라 장담했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때마다 말의 가벼움에 대해 생각한다.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로 이쪽과 저쪽으로 양분되려고 우리는 얼마나 처절하게 양심에 생채기를 냈던가. 나는 어떻다고 함부로 포장하는 몰염치는 너무 익숙해서 이젠 미안하지도 않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따져 묻는 사람은 없는데 굳이 그 어느 쪽이 되려고 부단히 나를 드러내고 있다. 당신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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