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
죽은 시인의 사회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6.09.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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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이미 알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딱 그만큼만 판단하고, 받아들이고, 연민하고 살아온 거죠.

아직 교탁(敎卓)을 발판 삼아 올라서 본 적이 없던 거예요. 그런 건 용납될 수 없는 이상한 행위로 비쳐질 거라는 두려움 같은 게 의식의 밑바닥에 깔렸던 겁니다.

뭔가 다른 위치에서 세상을 관찰하는 훈련이 많이 결핍되었던 시대를 따라 어느덧 흘러간 겁니다.(순응이 최고의 미덕처럼 여겨졌던 시대에 제대로 잡아먹히고 만 건 아닐까요.)

바보처럼 보여도 상관없다는 용기가 모자랐어요.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어요.

살아가는 시대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대개는 좁은 문, 좁은 길을 힘들어하는 거죠.

버텨야 하니까요.(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으며 스포트라이트가 번쩍거리는 레드카펫을 걷는 사람이 되고픈 마음 때문에 흔들리는 거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산다는 게 어디 쉽기만 한 일이냐고 되묻는 경우도 있더군요.(그것 또한 인내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하듯이 말이죠.)

감동이 포인트가 아닐까,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고 싶어요.

아무리 충실하게 자신의 일을 해냈더라도 영혼을 사로잡는 감동이 없다면, 그냥 열심히 산 것뿐일 수 있다고요.

어찌 됐든 예술적 감동을 주는 삶에 대한 고민의 끈을 굳게 붙잡고 싶어요.(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누구나 삶의 달리기를 마치고 나서 후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요.)

아, 정말인가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거 말예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를 1990년에 처음 만났었죠. 20년도 훨씬 더 지난 얼마 전에 재개봉했기에, 다시 보고 나서는 저리도 주절댔었답니다.

감동의 두께는 여전했어요. 키팅(Keating) 선생 역을 맡았던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는 이미 2년 전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지만요.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저처럼 영화를 다시 봤다는 뉴스도 즐겁지만, 19세기 중반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했던 선언은 다시 들어도 절절합니다.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 속으로 갔다. 깊이 파묻혀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며 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을 모두 떨치고 삶이 다했을 때, 삶에 대해 후회하지 말라.”

그래요. 실상은 후회하는 삶이 될까 늘 두려운 거죠.

우리 또한 한 편의 시가 되지 않고선, 죽은 시인의 사회를 벗어나기가 힘든 겁니다.

“내가 왜 이 위에 섰을까? 이 위에선 세상이 무척 다르게 보이지. 잘 아는 거라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거나 바보 같아도 반드시 시도해라.”

교탁 위에 올라섰던 키팅 선생의 말이 귀에 쟁쟁하군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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