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와 삼나무
이끼와 삼나무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6.09.2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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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울창한 숲으로 들어선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습한 기운이 감돈다. 줄지어 선 나무 틈새로 연둣빛 무리가 일렁인다. 그 빛에 이끌려 단숨에 삼나무 군락지 중턱에 올라 있다. 초록 이끼를 품에 안고 드높이 뻗어나간 삼나무 숲은 태고의 신비로움이 감돌았다. 이끼와 삼나무가 만난 조화로운 어울림. 마치 산등성이에 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듯하다. 어디선가 냉기가 밀려든다.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제주도 절물 자연휴양림에서 만난 삼나무. 나무들은 하나같이 온몸에 초록 양탄자를 씌운 듯 도탑게 이끼로 번져 있다. 그 풍경을 따라 누리는 평화가 좋다. 이곳은 총 300㏊의 면적에 삼나무가 수림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거진 숲 속 그늘은 바닷바람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삼나무 곁에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의 표피마다 보름달 같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롱아롱 이끼가 핀 것이다. 이미 해진 걸레처럼 사위어가는 것도 있고, 여름 들판처럼 한껏 초록을 품고 있는 나무도 보였다. 나무의 노고를 헤아린다. 처음에 이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무지였으리라.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수십 년간 등짐을 지고 인내한 결과물이다. 오직 그들만의 영역을 넓혀가라며 제 등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지 않은가. 오랜 세월 이끼의 번식을 위해 지지대 역할을 해 줬으리라. 마치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어르고 달래 키운 것처럼 말이다. 음지의 환경에서도 수많은 시련을 겪었을 터, 때론 모진 태풍에 가지가 꺾였을 터이고 때론 혹한에 상처입고 옹이처럼 패였으리라.

이런 생각에 미치자 또 다른 상념이 꼬리를 문다. 나는 여태껏 이끼는 남에 등에만 기대어 사는 기생물로 생각했다. 살며시 이끼를 만져보았다. 겉은 습하지만, 결은 부드럽고 포근하다. 이끼의 꽃말이 모성애이듯 그늘을 품지만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무에 음전하게 서려 끌어안는 것이리라. 또 삼나무에 증식하며 뻗어가지만 그 나무의 수분 증발을 막아주고 표피를 보호해준다. 이끼는 삶의 더께다. 그들의 겉모습은 한 몸처럼 보이나 속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삼나무를 바라본다. 초록 치마저고리 한 벌로도 비할 데 없이 요조하며 우주를 가슴에 품은 듯 말없이 생명을 빚어낸다. 이끼가 넓게 번져갈수록 등의 무게가 무거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무가 가엾지 않았다. 이끼는 그로 인해 우듬지 가까이로 번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에게서 누군가를 위해 배려한다는 일이 어떤 마음인지도 알았다.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공생진화론을 펴냈다. 공생(共生)이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생물이 같은 곳에 살며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어디 삼나무와 이끼뿐이랴. 악어와 악어새, 집게와 말미잘 등 많은 개체의 생명들이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도 공생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 사이에도 서로 스며들지 못해 관계가 틀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초에 있었던 일이다. 과묵한 남편과 정적인 내 성격이 맞지 않아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갑자기 마음을 맞춰가며 산다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남편과 나는 서로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뒤로 물러서기보다는 내 주장을 내세우려고 했다.

부부란 서로 마음에 스며드는 것,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한 가정을 이루는 일이 아니던가. 어느덧 우리 부부도 인생의 가을로 넘어섰다. 이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사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초록 이끼를 등에 업고 의연하게 서 있는 삼나무를 보면서 배려하는 지혜를 터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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