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유지하려는 전략
자존감 유지하려는 전략
  • 박숙희<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 승인 2016.09.18 1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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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박숙희

마음의 문을 열고 더 자세히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를, 가진 것 없이 줄 수 있는 삶으로 반추하려는 「직지」상권 스무 다섯 번째 이야기는 마조 도일(馬祖道一)스님의 말씀이다. 전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부산 화엄사 주지각성 스님의 ‘직지’번역 및 강해(1998년)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마조께서 말씀하시기를 “道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아니함이라. 만약 ‘도를 닦아 이룬다.’고 말한다면 닦아 이룸에 도로 무너져서 곧 성문과 같고 만약 ‘닦지 아니한다.’고 말한다면 곧 범부와 같다.”어떤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견해를 가져야 곧 도를 통달함을 얻습니까?”마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성에 본래 구족해 있으니 다만 선과 악에서 막히지 아니하면 도를 닦는 것이라고 말한다.”

道는 닦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깨달으면 바로 도를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닦는 것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란다. 한번 견성할 때 아는바 번뇌장, 소지장을 다 잊어버릴 경우에 다시는 닦을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닦는 것이 필요하단다. 도 자체는 닦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증독하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믿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단다. 도를 믿고 이해하고 닦고 증독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지 도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겠다.

만약에 도를 닦아 이루었다면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이란다. 집을 만들면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집이 만들어진 다음에 몇백 년 후에는 무너지듯이 말이다. 허공은 집을 만드는 것에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단다. 허공을 道라면 닦는 것은 집을 짓는 것이겠다.

道를 닦아 이루면 다시 무너져서 성문과 같다는 것이겠다. 소승성문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소승이라고 한단다. 성문들은 차원이 낮은 데서 도를 이해한단다. 성문은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一乘敎에서는 無我를 취소하고 다시 眞我를 말했단다. 성문은 소리 날 때만 들리고 소리가 사라진 다음에는 소리가 없다는 것. 그와 같이 허무하다는 것이겠다.

발심하지 못한 범부들은 아예 도를 닦지도 않는다. 도를 닦는다고 해도 틀리고 닦지 않는다고 해도 틀린 것이란다. 둘 다 허물이 있는 것이다. 선을 생각하면 선에 막히고 악을 생각하면 악에 막히지만 거기에 걸려들지 않으면 도를 닦는 것이 된다는 것이겠다.

이는 무위법과 유의법은 말하는 장면이 달라서 말을 달리한 것이지 뜻은 똑같다는 것이겠다. 처음에는 닦는 것을 말할 수 없다 하고 다시 닦는 것을 말하니까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모순되는 것은 없다는 것 아닐는지.

요즈음‘스폰서’이 세 글자에 코가 꿰어 메인 뉴스에 오르는 전문가 그룹이 있다. 그래도 인문계열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들 일부는 이 그룹의 일원이 되는 것이 꿈이 라고도 한다. 이들이 마조 도일 스님의 말씀 “선을 생각하면 선에 막히고 악을 생각하면 악에 막히지만 거기에 걸려들지 않으면 도를 닦는 것이 된다는 것이겠다.”처럼. ‘질긴 인연은 악연인걸’하면서 스폰서 문화의 깊은 뿌리를 캐 낼 지혜를 모아 봄도 나쁘지 않겠다.

그래서 만약 그 그룹에 입문하게 되면 어떠한 경우라도 자존감을 유지하려는 그 지혜 실천을 전략으로 곰곰이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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