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꽃
숨은 꽃
  • 박경희<수필가>
  • 승인 2016.09.18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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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박경희

며칠 전에 오랜만에 베란다를 청소하다 산세베리아에 꽃대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산세베리아가 꽃을 피우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라는데 이 산세베리아는 재작년 이사 때 사무실에서 보내준 꽤 큰 용설란[원래 이름]화분이다. 남들은 거실이나 방에 두어 공기정화를 도모한다는데 나는 처음부터 아예 베란다 구석에 내놓았다.

처음엔 잘 모르고 물을 자주 주어 두어 대를 잃고는 평소 잊혀진 여인처럼 한구석에 세워두고 잊을 만하면 한 번 정도만 물을 줄뿐 살뜰하게 돌본 기억도 없는데 기특하게도 꽃을 피운 거다. 참 작년 여름에는 현관 한쪽에 꿔다논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행운목이 꽃을 피우기도 했었다.

그 여름 어느 날 밤 어디선가 은은한 향내가 나서, 나는 처음 그게 창밖에 핀 줄장미의 향내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베란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은은한 향내가 나는 게 장미와는 좀 다른 고상한 향내였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보니 세상에나 신발장 한쪽 구석에 서 있던 키 큰 행운목에 꽃이 핀 거였다. 꽃은 하얗고 화려하지 않았고 개화수명도 짧아 일주일간 피었다가 졌지만 향내는 기가 막혔다.

식물도 유행이 있다.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그렇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새집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해 그런 종류의 식물이 유행되었던 것 같다.

내가 처음 신접살림을 차리던 1980년대는 꼭 시들어 가는 것처럼 이파리가 비틀어진 벤자민나무, 멀뚱한 막대기에 움이 핀 것 같은 행운목, 키 작은 대나무 같은 관음죽, 아이비, 꼭대기에 우산을 펴고 앉은 것 같은 바키라가 유행이어서 집들이 축하 화분을 사러 갈라치면 어느 화원이나 약속이나 한 듯 강력 추천하는 권장식물 1호가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화훼에 소질이 있는 편도 아니고 누가 갖다 주면 베란다에 내놓고 물이나 줄뿐 애지중지 공들여 키우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숨은 꽃들이 그것 말고 또 있었다. 잊혀진 여인처럼 한쪽에 밀쳐놨던, 잎이 없어 죽은 줄 알았던 분홍 호접란이 잎도 없이 껑충 꽃대를 올리고 세 송이나 꽃을 피웠다.

내가 저들에게 무심하게 등을 돌리고 내 일에 바삐 돌아갈 때도 숨은 꽃들은 내 눈길을 기다리며 저렇게 꽃을 피우고 있었던 거다.

나의 성실하지도 살뜰하지도 못한 온라인세계에도 숨은 꽃 같은, 보물 같은 친구들이 꽤 많이 있다. 전국네트워크에 퍼져 있는 꽃들….

그런데 칼럼 초기부터 변함없이 정말 숨은 꽃 노릇을 하는 또 한 분의 독자가 있다. 추석 무렵 난데없이 모르는 분으로부터 한과가 배달되었는데, 바로 그녀로부터였다. 참외 철에는 참외를 보내오고, 명절에는 한과나 옛날 과자를 보내오고, 올여름 대학 찰옥수수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받은 선물이었다.

모두에게 나눠줄 생각으로 받자마자 부지런히 압력솥에 옥수수를 삶았다. 숨은 꽃 그녀의 사랑을 얼른 먹고 싶었다. 대학 찰옥수수는, 값은 강원도 옥수수보다 배나 비싸지만, 당도나 찰기, 씹는 맛이 비교가 안 된다. 마치 오리지널 명품과 중국제 짝퉁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의 숨은 꽃 그녀 덕으로 옥수수 한 포대를 몽땅 삶아 앉은자리에서 먹고 아이들 몫으로 넉넉히 놓아두고, 나머지는 두고두고 먹기 위해 냉동실에 넣고 식기 전에 앞집과 아래층에 돌리러 다녀왔다.

내 글을 높이 사주는 그녀 앞에 그저 부끄러울 뿐 할 말이 없다. 내 잡문 같은 글이 과연 그녀에게 어떤 위안을 주기나 할까? 그저 한발 먼저 늙어 가는 선배의 소박한 경험이 실수를 막아주는 지혜로 승격될 수만 있다면 더없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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