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에
어느 가을날에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9.1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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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가을날의 느낌으로 대표적인 것은 쓸쓸함이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워지고, 발밑으로 낙엽이 나뒹굴 때, 사람들이 쓸쓸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연의 풍광이 쓸쓸함을 촉발시킨다면, 쓸쓸함을 배가시키는 것은 외로움이다. 그렇지 않아도 쓸쓸한 가을날에 찾아오는 이도, 찾아갈 이도 없다면 그 쓸쓸함은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시습(時習)은 어느 가을날에 쓸쓸함을 톡톡히 맛보아야 했다.

 

어느 가을날에-김시습

庭際無人葉滿蹊(정제무인엽만혜) : 마당에 사람은 없고, 길엔 낙엽이 가득해
草堂秋色轉凄凄(초당추색전처처) : 초가에 가을빛이 점차 쓸쓸해져 가네
蛩如有意跳相咽(공여유의도상열) : 귀뚜라미도 뜻 있는 듯 뛰면서 서로 울고
山似多情翠又低(산사다정취우저) : 산도 정 많은 듯 푸르고도 낮아졌네
世事到頭之者也(세사도두지자야) : 세상사가 머리끝에 이른 상황에서도
閑情輸却去來兮(한정수각거래혜) : 한가한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구나
欲談細話誰將伴(욕담세화수장반) : 세상이야기 함께 할 사람은 누구던가
銷得南山一杖藜(소득남산일장려) : 남산의 명아주지팡이 다 닳아버렸구나


시인이 사는 집의 마당에는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마당으로 통하는 좁은 길에 낙엽이 가득 쌓여 있다.

사람은 없고 낙엽만 무수히 쌓인 형국이니 시인의 가슴에 쓸쓸한 감정이 밀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인이 사는 초가집에는 가을빛이 물들어 하루가 다르게 쓸쓸한 분위기가 더해져 가고 있었다.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들은 무언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이,펄떡펄떡 뛰어가면서 서로를 향해 절규하듯 울어댄다.

집 주변의 산도 마치 이것저것 쌓인 생각이 많은지 푸르고도 낮게 보인다. 이러한 가을 광경에 시인은 세속의 번다한 일로 머릿속이 복잡한 경우에도 한가한 느낌은 오락가락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한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세상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그래서 누군가를 틈만 나면 찾아가곤 하였는데, 어찌나 자주 찾았는지, 단단하여 달지 않기로 유명한,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가 모두 달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가을은 그 풍광만으로 쓸쓸함을 유발하지만, 사람의 외로움이 겹쳐지면, 그 쓸쓸함이 배가된다. 이럴 때 절실한 것이 친구이다. 보고 싶을 때 하시라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다면 가을은 결코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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