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양반과 선비문화
충청도 양반과 선비문화
  • 박상일<역사학박사·청주대 박물관>
  • 승인 2016.09.0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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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박상일<역사학박사·청주대 박물관>

청풍명월로 상징되는 충청도는 양반의 고장이라 일컬어진다. 양반이란 조선의 신분제도에서 문반과 무반을 아우르는 지배계층에 대한 칭호에서 비롯되었지만 사전적 의미는 지체나 신분이 높거나 문벌이 좋은 상류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 외에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에 대한 존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충청도 사람들이 문무반의 높은 벼슬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충청도 양반이 바로 신분계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충청도 사람을 양반이라 한 것은 심성이 어질고 언행이 신중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양반과 선비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선비 역시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서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을 갖는다. 중국에서 ‘사’는 은대에 관직명으로 나타나지만 주대에는 왕(천자)·제후·대부·사·서인의 5등 신분계급에서 ‘사’는 네번째이며 관류의 직분으로서는 가장 하위에 속하는 계급이다. 그러나 공자를 중심으로 유교사상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사’의 성격은 관직과 분리되어 인격의 의미로 이해됐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을 ‘사’의 집단으로 자각하였고, 유교이념을 실현하는 인격을 선비로 확립했다. 공자는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해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고 했다.

선비라는 말은 삼국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선의 선비는 유교적 덕목을 중시하고 이를 실천한 신진사림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건국세력을 중심으로 문벌을 이룬 훈구세력에 대항해 새로 진출한 인물들로서 절의와 지조를 목숨보다 중히 여겼으며 자신들을 사림파로 구분하고 선비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했다. 도학의 이념을 철저히 수련하고 실천하며 사회의 개혁의지를 발휘하려다 보니 훈구파의 저항으로 수차례 사화(士禍)를 겪어야 했다. 사화는 곧 사림파 선비들의 엄청난 희생이었지만 마침내 선비들이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는 사림정치시대를 이뤘고, 사회의 지도층에서 선비는 가장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충청도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서원이 김정을 배향한 보은 상현서원이고 이어서 청주 신항서원이 건립되었는데 박훈 송인수 김정 한충 등의 배향인물이 모두 사림파로서 이들을 ‘낭성팔현’으로 추앙한 것은 청주지역을 대표하는 선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학통이 이어져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됨으로써 기호학맥이 형성되고 조선후기의 정치적 학문적 중심을 이뤘다. 선비는 학문에 힘써야 했고, 학문을 통해 얻은 지식과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보고 벼슬을 해야 했다. 선비로서 관직에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관직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관직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펴고 신념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다. 국난을 당해서는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했으니 충청도에 의병과 독립운동 인물들이 많은 데는 이러한 역사적 지역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높은 관직을 이용해 권세를 부리고 부를 축적한 사람은 부패한 세도가일 뿐 선비는 아니었다. 선비는 항시 자신을 경계했으며 임금에게조차 무조건적인 복종보다 잘못이 있으면 간언해 잘못을 바로 잡으려 하고, 바른 도리가 실현될 가능성이 없거나 맡은 바 직책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물러났다. 지난 6일부터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선비의 일상을 엿보다'라는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다. 선비의 차림새 학문 사랑방 풍류 접빈객봉제사 등 다섯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에 값비싼 유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비의 고장 청주에서 열리는 특별전이어서 의미가 있다. 선비문화가 우리 지역의 좋은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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