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의 시작 임시정부 항주시대를 온몸으로 느끼며
피난의 시작 임시정부 항주시대를 온몸으로 느끼며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9.0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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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13년간의 상하이 임시정부 시대는 이봉창 윤봉길 의거로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심해져서 피난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향후 7년간의 3만리 긴긴 장정의 시작이며 임시정부와 우리 독립 운동사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거금 60만원의 현상금이 걸린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들은 모든 활동에 제약을 받고, 비상시국이 시작된 시기가 바로 항저우 시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오늘처럼 아름다운 서호는 말없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안아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줬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청사는 그렇게 서호 근처 호변촌에서 청사를 구성하고 임시정부를 꾸려갔다.

김구 선생은 항저우에서 가흥(자싱)으로 피난을 가면서도 국무령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고 한다. 이때 일제의 감시와 체포를 피해 목숨을 걸고 김구 선생을 도와준 고마운 분들이 계신다. 저보성과 주애보라는 이분들의 헌신과 노력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이분들의 집과 별장이 잘 보존되어 있고, 김구 선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당시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항저우의 임시정부 청사를 답사하면서 필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난 시절 그렇게도 열악한 상황에서 도움을 준 분들도 고맙지만 현재에도 임시정부 청사를 잘 복원하고 찾아오는 답사단을 정성껏 맞이해 주시는 모습에서 따뜻한 인간애가 느껴진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안내자 분들의 모습에서 90여 년 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찾아왔던 대한민국의 임정 요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거처를 마련해 주면서 어려운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우리가 가장 많이 찾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보다 더 잘 구성하고, 더 정성껏 보존하면서 항저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존재했던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섭씨 35도를 넘는 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우리 일행에게 항저우의 두번째 임시정부 청사 건물과 한국독립당이 있던 주택까지 안내를 해줬다.

한국독립당은 1926년부터 일어났던 민족유일당운동이 결렬된 직후인 1930년 상하이에서 결성된 단체인데, 안창호, 김구, 조소앙 선생 등이 주도한 정당이다.

나는 이들의 친절 속에 어려움을 당한 형제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형제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서호의 아름다운 경치는 여전하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 위에는 서호가 있다.’는 마르코폴로의 표현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서호지만 사실 이때가 임시정부에는 가장 빈약하고 힘든 시기였다.

임정 요인들에게는 서호를 바라보며 소동파의 시구를 낭만적으로 흥얼거리는 감상에 젖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서호의 풍경마저 처량하게 비치지는 않았을까?

나는 항저우 임시정부가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서도 독립과 광복에 대한 희망의 끊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서호 호수가 송나라 충신 악비의 무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악비가 누구인가? 한말 의병장들이 충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존경하던 충신 중의 충신이 아닌가?

악비의 무덤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변치 않는 충성을 다짐하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까지 희망의 길, 3만리의 장정의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90여년 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시던 임들의 그림자가 서호의 물길 속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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