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소 한 마리
암소 한 마리
  • 이수안<수필가>
  • 승인 2016.09.04 19: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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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

내가 어릴 적에는 소가 큰 재산이었다. 그래서 소도둑이 많았는데, 한 번은 우리 큰집에서 소를 도둑맞았다. 치밀하게도 도둑은 소의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외양간에서 대문까지 멍석을 깔아놓고 소를 몰고 갔다.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큰집 식구들을 위로했지만, 어른들의 상심은 오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소를 아주 정성 들여 키웠는데, 그 시절 고향에는 여름날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펼쳐지는 풍경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동네 뒷산 솔숲으로 하나 둘 모여드는 것이다. 소를 먹이러 가기 위해서였다.

한낮의 땡볕이 조금 순해지는 시각이 되면 아이들은 솔숲에 매어둔 자기 집 소의 고삐를 풀어 산을 오른다. 그때 산을 오르던 어미 소와 송아지 그리고 우리의 행렬을 생각하면 그 자체가 자연의 일부였지 싶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야말로 우리들 세상이다. 풀이 지천인 산으로 소를 올려 보내고 우리는 원 없이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된다. 놀이는 다양하다. 공기놀이, 땅따먹기, 나뭇가지 꺾어서 노는 집짓기 놀이 등.

그때 함께 소 먹이러 다니며 놀던 친구, 가장 가깝게 지낸 동갑내기 친구가 근처에 산다. 친구는 남편과 단둘이 살면서 고추농사를 이천여 평 짓고 있다. 그 외에도 소소한 밭작물 재배로 바쁜 사람이 그때처럼 암소를 한 마리 키우고 있다. 큰 규모의 축산인도 수지 맞추기가 어렵다는 시대에, 친구는 달랑 한 마리의 암소를 대체 왜 키우는 걸까.

한동안 만나지 못한 그 친구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고추밭에 일이 많은지 친구의 손이 나무껍질처럼 거칠다. 고단해 보이지만 표정은 밝다. 송아지를 사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새끼를 배었다며 싱글벙글한다. 이 암소는 지난 초겨울에 가출한 경력이 있다.

처음으로 짝짓기해야 할 때였다고 한다. 한번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어 황소를 데려오지 않았더니 스스로 사랑을 찾아 나선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친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큰 눈을 껌벅거리며 집을 찾느라 두리번거릴 소 생각에 애간장이 다 녹는 것 같았다. 그러기를 이틀 만에 이웃 동네 사람이 십리나 떨어진 산속에서 소를 발견했다. 그 소가 이제 두 달 뒤면 예쁜 새끼를 낳는다며 손자를 기다리는 할머니처럼 좋아한다.

미소 띤 친구의 얼굴에 그늘 한 자락이 스친다. 친구는 본의 아니게 두 아이와 헤어져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부당하고 힘든 결혼생활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은 소처럼 성실한 현재의 남편을 만나 밝게 살지만, 두 아이 생각에 잠시인들 온전히 행복한 순간이 어찌 있겠는가. 암소는 본능이 원하는 대로 황소를 찾아 길을 나섰지만, 본능보다 이성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친구의 현실이다.

친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몸을 혹사하는 것이 안쓰러워 좀 쉬엄쉬엄 하라고 하면, 잠시라도 육신을 편하게 두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노라고 했다. 노동을 통해서라도 정신적 고통을 잊고 싶은 모성이 애잔하다.

두런두런 암소에게 말을 건네는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암소를 키우는 이유는 이거였구나. 친구는 한 마리 암소를 통해 혈육을 만나지 못하는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래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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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영 2016-10-12 16:31:09
님의 글을 읽자니 내 어릴적 소 풀 먹이러다니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ㅎㅎ
비오기 전날이면 헛간 가득히 풀을 베어다가 쌓아두었던 생각이 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