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메달 대 동메달
은메달 대 동메달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08.3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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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리우 올림픽이 끝났다. 모기 전염병 때문에 걱정도 많았고 러시아 도핑 때문에 우왕좌왕했지만 큰일 없이 끝났다. 수영선수가 강도를 당했다는 것이 거짓말로 판명되면서 브라질은 한숨을 쉬었지만, 미국 젊은이 몇몇이 브라질을 우습게 안 것은 어쩔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묻는다. 은메달을 딴 사람의 표정이 더 밝을까, 금메달 딴 사람의 표정이 더 밝을까? 우리의 눈에는 금은메달을 딴 사람이 우선 들어오지 동메달까지는 가지 않는다. 게다가, 비교하면 좌우로 금과 은을 비교하거나 금과 동을 비교해도, 금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은과 동을 비교하지는 않기 때문에 잘 모를 일이다.

미국의 심리학자들이 은메달을 딴 사람과 동메달을 딴 사람의 표정을 비교해본 결과는 동이 은보다 훨씬 밝다. 은메달은 금메달을 못 따서 분해 죽겠거나 아쉬워 미치겠다는 표정이라면, 동메달은 다행히 메달은 땄다는 안도의 표정이란다.

메달리스트라는 말이 있다. 거기에 금은동의 차이는 없다. 메달만 따면 메달리스트다. 동을 따도 메달리스트고 은을 따도 메달리스트고 금을 따도 메달리스트다. 기쁨의 정도는 당연히 금메달리스트가 최고인 줄은 알겠는데 이어서는 은메달리스트가 아니라 동메달리스트라니, 인생 참 재밌다.

메달집계의 방식으로는 금은동을 한데 섞어서 순위를 매길 수도 있지만 우리처럼 금부터 순위를 매기는 방식에서는 은과 동의 구분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은과 동은 그저 금에 비해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결국 행복의 문제다.

얼마 전 행복에 대한 국제회의가 있었다. 내가 노자와 장자를 맡았는데, 이후 글을 실으면서 결정한 제목이 ‘됐다와 놀자’였다. 됐다와 놀자는 노자의 지족(知足)과 장자의 소요(逍遙)를 우리말로 한 것인데, 보수적인 학계임에도 잘 받아줘서 논문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만하면 됐다’, ‘오늘을 즐기자’고 생각하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였다. ‘10만원이면 됐다’고 생각하면 행복한데, ‘20만원이 아니라서 섭섭하다’면 불행하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질질 따라가면 불행한데, ‘그래, 어쩔 수 없으면 즐겨’라고 받아들이면 행복하다. 세상일의 어떤 부분[그쯤]에서 만족할 줄 알고, 나에게 주어진 것[본성]을 즐기라는 요지였다. 우리가 잘 아는 공자의 ‘천명을 아는 나이’(知天命)도 마찬가지여서, 나이 쉰이 되면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이겠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개념이 특수상대성이었다. 말은 거창하지만 뜻은 별거 아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잘 안다. 잘살고 못사는 것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런데 일반상대성은 끝없이 비교하게 되어 행복하지 않지만, 특수상대성은 특정한 것과 비교하는 것이라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쓰나미로 나는 다리를 잃었지만 남들은 죽은 경우를 떠올려보자.

은메달리스트의 표정이 동메달리스트보다 어둡고 씁쓸한 것은 그의 상대성이 금메달에 있기 때문이다. 동메달리스트의 얼굴이 밝은 것은 그의 상대성이 노메달에 있기 때문이다. 특수상대성의 원리는 사회가 아닌 개인, 상향이 아닌 하향, 무수한 대상이 아니라 유일한 대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야 ‘행복 중 불행’이 아닌 ‘불행 중 다행’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공자님은 군자(君子)라는 특수상대성을 설정하여 ‘또한 기쁘지 아니한갗라고 외치셨지만, 오늘의 나, 아침 먹어서 행복하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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